"네"라는 병

거절하면 버림받을까 봐 두려웠던 나의 생존 본능

by 하루

나의 혀에는 이상한 스프링이 달려 있는 게 분명했다. 누군가 부탁을 하면, 내 뇌가 "안 돼, 싫어, 못 해"라고 판단하기도 전에 혀가 먼저 튀어 나갔으니까. "네, 그럼요! 제가 할게요."


금요일 오후 4시 50분. 퇴근을 10분 앞두고 있었다. 컴퓨터 화면에는 이미 꺼놓은 문서 창들이 줄지어 있었고, 가방은 이미 의자 옆에 걸쳐져 있었다. 오늘은 정시에 나가서 오랜만에 영화관에 가려고 했다. 혼자 보는 영화. 팝콘과 콜라.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완벽한 저녁.


그때 메신저 알림이 울렸다. 선임이었다. 화면에 메시지가 떴다.

[쌤, 바빠요?]

심장이 철렁했다. 이 시간에 오는 "바빠요?"는 절대 안부가 아니다. 나는 알았다. 이건 부탁의 전조다. 하지만 내 손가락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거짓말이었다. 나는 바빴다. 아니, 바쁘지 않아도 이제 퇴근 10분 전이었다. 하지만 "바빠요"라고 대답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게 무례하게 들릴까 봐. 냉정하게 보일까 봐.


[이번 주말에 행사 지원 나갈 사람이 펑크가 났는데... 혹시 시간 돼요? ㅠㅠ]

주말. 나는 모처럼 아무 계획 없이 집에서 쉬려고 했다. 밀린 잠을 자고, 보고 싶었던 영화를 보고,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침대에 누워 있고 싶었다. 완벽한 휴식. 완벽한 계획.

하지만 내 손가락은 이미 배신자가 되어 있었다.


[아, 네! 저 이번 주말에 별일 없어요. 제가 갈게요 ^^]

전송. 전송 버튼을 누르는 순간, 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 또...' 별일이 없긴 왜 없어. 내 휴식이 별일이 아니라는 건가. 내 주말이 그렇게 하찮은 건가. 김 과장님의 답장이 바로 날아왔다.


[역시 쌤! 구세주야 ㅠㅠ 고마워요!]

구세주. 나는 그 단어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구세주는 자기 목숨을 바쳐 남을 구하는 사람이다. 나는 딱 그 짓을 하고 있었다. 내 주말을, 내 휴식을, 내 영화를, 내 팝콘을 제단에 바쳤다. 영화관 예매는 취소했다. 환불 수수료가 붙었다. 나는 지독한 '예스맨(Yes Man)'이었다.


대학생 때부터 그랬다. 조별 과제에서 누군가 "이 부분 누가 할래?"라고 물으면, 정적이 흐르는 그 3초를 견디지 못하고 "제가 할게요"라고 말했다. 직장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주말 행사 지원 나갈 사람?" "야근 가능한 사람?" "이 업무 맡아줄 사람?" 그 질문들이 허공에 던져지는 순간, 나는 참지 못하고 손을 들었다. 마치 학교에서 선생님이 "아무도 안 풀었어요?"라고 물으면 착한 학생이 나가서 문제를 푸는 것처럼.

사람들은 나를 칭찬했다. "배려심이 정말 깊으세요."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건 배려가 아니었다. 이건 '병'이었다. 왜 나는 거절을 못 했을까. 심리학에서는 이를 '유기 불안(Abandonment Anxiety)'이라고 설명한다. 타인에게 버림받거나 소외되는 것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 나는 거절이 곧 관계의 종말이라고 믿었다.


"안 돼요"라고 말하는 순간, 상대방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지는 게 보였다. 눈빛이 식고, 입꼬리가 내려가고, "아, 그래요?"라는 차가운 대답이 돌아오는 게 들렸다. 그리고 그 사람은 나를 이기적인 사람으로 낙인찍고, 두 번 다시 나를 찾지 않을 거라고 상상했다.


혼자가 되는 것. 미움받는 것. 무리에서 도태되는 것. 그것보다는 주말 하나쯤 포기하는 게, 야근 좀 하는 게 나았다. 그래서 나는 나의 'Yes'를 일종의 '구독료'처럼 지불했다. 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멤버십 비용. 매달 갱신해야 하는 회원권. 내가 싫은 내색 안 하고, 궂은일을 도맡아 하고, 언제나 웃으면서 "네"라고 말해야만 사람들이 나를 곁에 두어줄 거라고 믿었다.


나의 자존감은 그렇게 타인의 '인정'에 기생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스맨'의 결말은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또 다른 일들이 몰려왔다. 구독료를 내면 낼수록, 사람들은 고마워하기는커녕 가격을 더 올렸다. "OO 씨는 원래 이런 거 잘하잖아." "이번에도 부탁해. OO 씨밖에 없어." 그들은 나의 호의를 권리처럼 누렸고, 나는 점점 더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느라 너덜너덜해졌다.


더 비참한 건, 정작 내가 힘들 때였다. 몇 달 뒤, 나는 과로로 쓰러졌다. 응급실까지 갔다 왔다. 의사는 "스트레스성 위염과 불면증"이라고 진단했고, 며칠 쉬라고 했다. 나는 병가를 냈다.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보는데, 메시지가 왔다. 친한 동료 선배였다. 갑자기 큰일이 생겨서 내일 회의 자료를 대신 준비해 줄 수 있냐는 부탁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거절했다. 아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선배님, 죄송한데 지금 몸이 안 좋아서 병가 중이에요. 이번엔 어려울 것 같아요.]

전송 버튼을 누르는 순간, 심장이 쿵쿵 뛰었다. 손이 떨렸다. '내가 지금 뭐 한 거지. 선배가 화내면 어떡하지. 나 때문에 일이 꼬이면 어떡하지.' 선배의 답장이 왔다.


[아, 그래? 몸조리 잘해. 내가 알아서 할게.]

그게 다였다. 하늘이 무너지지도 않았고, 관계가 끊어지지도 않았다. 선배는 화내지 않았고, 나를 이기적이라고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냥 "알았어"였다. 며칠 뒤 출근했을 때도, 선배는 여전히 나에게 웃으며 인사했다.


나는 깨달았다. 고작 거절 한 번 했다고 끊어질 관계라면, 그건 애초에 이어질 가치가 없는 '동아줄'이었다는 것을. 나는 그 썩은 동아줄을 잡고 있겠다고 내 영혼을 갈아 넣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더 충격적인 사실을 알았다. 내가 그렇게 무리해서 'Yes'를 남발했던 사람들. 그들은 정작 내게 부탁할 때는 너무나 쉽게, 쿨하게 거절했다는 것. "아, OO 씨 미안. 내가 좀 바빠서." "그건 좀 곤란한데."

그들의 거절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미안해하지만 죄책감에 찌들지는 않았고, 당당했지만 무례하지는 않았다. 그냥... 거절이었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거절은 상대를 공격하는 칼이 아니라는 것을. 나를 지키는 '방패'라는 것을. 내 시간, 내 에너지, 내 감정은 무한하지 않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덜 중요한 것에 대해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이제 연습 중이다. 혀에 달린 스프링을 제거하는 연습. "죄송하지만, 이번엔 어려울 것 같아요."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요." "제가 도와드리고 싶은데, 지금은 제 일도 밀려 있어서요."


이 문장들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나는 여전히 심장이 쿵쾅거린다. 목소리가 떨리고, 손에 땀이 차고, 상대방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는 게 보이면 '아, 내가 잘못했나' 싶어진다. 혹시 이 사람이 나를 싫어하게 되는 건 아닐까. 혹시 나 때문에 일이 꼬이는 건 아닐까.


하지만 참는다. 그리고 지켜본다. 놀랍게도, 사람들은 생각보다 쉽게 "아, 그래? 알았어"라고 말한다. 하늘이 무너지지도 않고, 관계가 끊어지지도 않는다. 그들은 당황하지 않고 다른 방법을 찾는다. 나 없이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그토록 무너질까 봐 떠받치고 있던 관계들. 그건 사실 나 없어도 무너지지 않는 관계들이었다는 것을. 정작 무너지고 있던 건, 나였다. 이제 나는 가끔 생각한다. 만약 내가 처음부터 거절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과연 내 곁에 누가 남아 있었을까?


그 답이 무섭다.

하지만 동시에, 알고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