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7명에서 118명으로
핸드폰 연락처를 열었다. 스크롤을 내렸다. 계속 내렸다. 총 437명. 나는 이 사람들을 다 알까?
ㄱ
강민수 - 고등학교 동창. 10년 전 졸업식 이후로 연락 안 함.
강지현 - 대학교 조별 과제 했던 사람. 과제 끝나고 연락 끊김.
고은별 - 누군지 모르겠음.
권태훈 - 군대 선임. 전역하고 한 번도 안 만남.
ㄴ
남궁민 - 누군지 진짜 모르겠음.
ㄷ
도현우 - 대학 동기. 만나면 자기 자랑만 함. 기 빨림.
ㅁ
문정아 - 예전 직장 동료. 필요할 때만 연락 옴.
박수진 - 친구 친구. 한 번 만났음. 왜 연락처가 있지?
나는 멈췄다. '이 사람들이 정말 내 인맥일까?' 437명 중에서, 진짜 '관계'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핸드폰을 내려놓고 생각했다. 관계도 살이 찐다. 처음에는 가볍다. 만나서 인사하고, 연락처 교환하고, 가끔 연락하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쌓인다. 고등학교 친구, 대학교 동기, 직장 동료, 친구의 친구, 모임에서 만난 사람, 학부모, 학원 강사, 동네 주민... 그렇게 연락처는 늘어만 간다.
문제는 관리가 안 된다는 것이다. 명절 때마다 단체 문자가 온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강민수]
나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답장을 보낸다.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생일 축하 알림이 뜬다.
[오늘은 권태훈 님의 생일입니다.]
'이게 의미가 있나?' 더 큰 문제는 기 빨리는 사람들이었다. 도현우. 대학 동기인데, 만나면 자기 자랑만 한다. "나 요즘 프로젝트 대박이야. 회사에서 인정받고 있어." "나 이번에 차 바꿨어. 수입차로." "나 이번에 강남 아파트 계약했어." 처음에는 "오, 축하해!" 했는데, 만날 때마다 똑같은 패턴이었다. 내 얘기는 안 물어본다. 내가 요즘 어떤지, 뭐 하는지. 그냥 자기 자랑만 쏟아내고 간다. 만나고 나면 기가 쭉 빠진다. '나는 뭐 하고 있지? 나는 왜 이렇게 못났지?'
문정아. 예전 직장 동료. 평소에는 연락 없다가, 필요할 때만 연락 온다.
[OO아, 바빠? 이거 좀 물어볼 게 있는데...]
[OO아, 혹시 이거 아는 사람 있어?]
[OO아, 이번에 부탁 좀 들어줄 수 있어?]
처음에는 도와줬다. '친구니까 당연하지' 했다. 하지만 매번 필요할 때만 연락이 왔다. 내가 힘들 때는? 연락 없다. 나는 자판기였다. 필요할 때만 버튼 누르는.
그날 밤, 나는 결심했다. 관계 다이어트를 하자. 몸에 살이 찌면 다이어트를 한다. 불필요한 지방을 빼낸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불필요한 관계를 정리해야 한다. 핸드폰 연락처를 다시 열었다. 그리고 기준을 정했다.
1. 지난 1년 동안 연락 안 한 사람 → 삭제
2. 만나면 기 빨리는 사람 → 삭제
3. 필요할 때만 연락하는 사람 → 삭제
4. 누군지 기억 안 나는 사람 → 삭제
삭제를 시작했다.
강민수 - 삭제.
강지현 - 삭제.
고은별 - 삭제.
권태훈 - 삭제.
남궁민 - 삭제.
도현우 - 손가락이 멈췄다. '이 사람은... 대학 동기인데. 삭제해도 되나?' 하지만 생각해 보니, 만날 때마다 기가 빠졌다. 만나고 나면 우울했다. '친구'라는 이름만 붙어 있을 뿐, 실제로는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었다.
삭제.
문정아 - 삭제.
박수진 - 삭제.
한 시간 동안 계속 삭제했다. 437명 → 328명 → 215명 → 147명. 그리고 멈췄다. 147명. 이제 이 정도면 진짜 관계만 남은 것 같았다.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연락처를 정리하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예전에는 명절만 되면 스트레스였다. '단체 문자 누구한테 보내지? 빠뜨리면 안 되는데.' 이제는? 진짜 연락하고 싶은 사람한테만 보낸다. 20명 정도. 그리고 그 사람들한테서 진심 어린 답장이 온다.
생일 알림도 줄었다. 예전에는 하루에 2~3개씩 생일 알림이 떴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 이제는? 한 달에 5명 정도. 그리고 그 사람들한테는 진심으로 축하 메시지를 보낸다. 더 놀라운 건, 도현우에게서 연락이 왔다는 거였다.
[OO아, 요즘 어때? 오랜만에 밥 한번 먹자.]
예전 같았으면 "응, 좋아" 했을 텐데. 나는 답장을 안 했다. 며칠 뒤, 또 연락이 왔다.
[바빠? 시간 나면 연락해.]
나는 대답했다.
[요즘 좀 바빠. 나중에 연락할게.]
그 후로 연락이 없다. 나는 죄책감이 들까 봐 걱정했는데, 의외로 마음이 편했다. '안 만나니까 오히려 편하네.' 나는 또 죄책감을 느낄 줄 알았는데, 안 느꼈다. 오히려 속이 후련했다. 한 달이 지났다. 연락처는 147명에서 123명으로 더 줄었다.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긴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남은 123명은 진짜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요즘 나는 사람을 만날 때 기준이 생겼다. "이 사람을 만나고 나서 기분이 좋아지나, 나빠지나?"
만나고 나서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 → 계속 만난다.
만나고 나서 기분이 나빠지는 사람 → 안 만난다.
간단하다. 지난주, 대학 동기 모임이 있었다. 단톡방에 공지가 떴다.
[이번 주 토요일에 모임 합니다! 다들 오세요!]
예전 같았으면 무조건 갔다. '가야지, 동기 모임인데.' 하지만 나는 생각해 봤다. '이 모임에 가면 기분이 좋아질까?' 솔직히, 아니었다. 모임에 가면 도현우 같은 사람들이 자기 자랑만 한다. 듣고 있으면 기가 빠진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우울하다. '나는 뭐 하고 있지?'
나는 답장했다.
[죄송합니다. 개인 일정이 있어서 이번엔 불참할게요.]
몇 명이 답장했다.
[아쉽네요. 다음에 봐요!]
끝.
나는 토요일에 집에서 쉬었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그냥 아무것도 안 했다. 그리고 일요일 아침, 기분이 좋았다.
'안 가길 잘했네.'
며칠 전, 친구 수진이가 전화를 했다. "철연아, 이번 주말에 시간 돼? 밥 먹자." 나는 수진이를 만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수진이는 내 얘기를 들어준다. 진심으로 관심을 가져준다. "응, 좋아. 어디서 볼까?" 토요일에 수진이를 만났다.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산책을 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 기분이 정말 좋았다. '이게 진짜 친구구나.'
나는 깨달았다. 관계는 양이 아니라 질이다. 437명의 연락처를 가지고 있어도, 진짜 친구가 없으면 외롭다. 하지만 123명, 아니 10명만 있어도, 그들이 진짜 친구라면 충분하다. 관계 다이어트. 불필요한 관계를 정리하는 것. 만나면 기 빨리는 사람과의 거리 두기. 필요할 때만 찾는 사람에게 "No" 하기. 누군지도 모르는 연락처 삭제하기. 처음에는 무서웠다.
'이러다가 외로워지는 거 아닐까?' '친구가 다 떠나는 거 아닐까?'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오히려 더 풍요로워졌다. 양은 줄었지만, 질은 높아졌다. 피상적인 관계 100개보다, 진심 어린 관계 10개가 훨씬 나았다. 오늘 아침, 핸드폰을 열었다. 연락처: 118명. 또 조금 줄었다.
하지만 이 118명은 진짜 소중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안다. 관계도 정기적으로 다이어트가 필요하다는 것을. 1년에 한 번쯤, 연락처를 정리하고, 관계를 돌아보고, 불필요한 것을 정리하는 것. 그게 나를 지키는 방법이다.
만나면 기 빨리는 사람?
삭제.
필요할 때만 찾는 사람?
삭제.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
삭제.
핸드폰을 내려놓고 미소 지었다.
가볍다.
마음이, 관계가, 인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