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사지 part 1

공감, 관계의 첫걸음

by Appendix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되잖아"라는 말은 마치 "운동화로 에베레스트 등반해 보자"라고 외치는 것만큼이나 허무한 구호이다.


공감은 말처럼 쉽지 않고, 때론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이다.

그래도 이 험난한 여정을 떠나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며 사는 세상에서 서로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는 노력은 최소한의 예의이자, 더 나은 관계로 가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건 마치 신발을 빌려 신어보는 것과 같다.

문제는 그 신발이 내 발에 맞을 리가 없다는 점이다.

내가 270mm라면, 상대는 250mm를 신을 수도 있으니까.

사람마다 자라온 환경, 경험, 현재 상황이 모두 다르니 완벽한 공감은 불가능에 가깝다.


내가 새벽 5시에 일어나 생산성을 뽐내는 아침형 인간일 때, 상대는 밤샘 작업이 익숙한 올빼미형 인간일 수 있다.

그래도 신발을 빌려 신어보려는 시도 자체가 중요하다.

적어도 "이 신발은 이렇게 꽉 조이는구나"라고 느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공감의 첫걸음이다.


70억 개의 렌즈, 각자의 세상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렌즈로 세상을 본다.

이 렌즈는 어린 시절 들었던 동화에서부터 대학 시절의 실패 경험, 직장에서의 성취감, 심지어 어제 본 영화의 여운까지 얽히고설켜 만들어진다.

내가 "여름휴가는 무조건 바다로 가야지"라고 확신할 때, 상대는 "계곡이 더 시원하고 좋아"라며 의아해한다.

둘 다 자기 세계에선 절대적 진리다.

주말에 넷플릭스를 보며 쉬는 게 최고라고 믿는 나와, 등산하며 땀 흘리는 게 힐링이라는 친구 사이의 간극은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역지사지는 이 다른 렌즈를 잠깐 들여다보는 일이다.

"등산은 나한테 안 맞지만, 친구가 산에서 느끼는 자유로움은 이해해 볼 만해"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공감의 문이 열린다.

완벽히 같은 렌즈를 쓸 순 없어도, 상대의 렌즈를 존중하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다.


뇌, 자기중심적 편파 방송

우리의 뇌는 자기만의 플레이리스트만 틀어대는 까다로운 DJ이다.

'확증 편향' 때문에 우리는 믿음과 맞는 정보만 VIP로 초대하고, 반대 의견은 "다음 플레이리스트에 없어요"라며 문전박대한다.

재택근무를 선호하는 내게 사무실 출근을 좋아하는 동료의 의견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에 '근본적 귀인 오류'라는 함정도 있다.

누군가 약속에 늦으면 "시간관념이 어쩜 그렇게 없을 수가 있어"라고 단정하지만, 내가 늦으면 "오늘 아침에 커피를 쏟아서 치우느라 정신없었어"라며 변명한다.

도로에서도 마찬가지다. 남이 끼어들면 "무례한 운전자"라고 화내지만, 내가 끼어들 땐 "급한 전화가 와서 어쩔 수 없었어"라고 자신을 정당화한다.


이런 뇌의 편파 방송을 인지하는 게 중요하다.

'내 플레이리스트 말고 다른 노래도 들어볼까?' 하는 태도가 공감의 열쇠다.

뇌가 아무리 자기중심적이라도, 의식적으로 다른 채널을 틀어보면 새로운 멜로디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공감은 근육처럼 단련해야 하는 기술이다.


대화 중에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네"라고 한마디 던지는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달라진다.

친구가 회사 스트레스를 털어놓을 때, "그냥 참아"라고 하기보다 "그 상황이면 나도 스트레스받았을 거야"라고 맞장구치면 상대는 '내 말에 공감하고 있구나' 하고 마음을 연다.


'리플렉팅' 기법도 유용하다.

"그러니까, 네 말은 동료들이 예의가 없어서 화가 난다는 거지?"라고 물으면, 상대는 자신의 말이 제대로 전달됐음을 느낀다.

또 다른 예로, 친구가 "요즘 일이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어"라고 말했을 때, "업무가 많아서 많이 버겁구나"라고 반영해 주면 상대는 자신의 감정이 인정받는 느낌을 받는다.


처음엔 다소 어색할 수 있지만, 이런 공감을 연습하면 어느새 상대의 마음을 읽는 근육이 단단해진다.

마치 처음 헬스장에 갔을 때는 5kg 아령도 버거웠지만, 꾸준히 운동하면 어느새 15kg도 가뿐히 드는 것처럼 말이다.


일상에서 실천하는 작은 공감

공감은 거창한 선언이 아닌 작은 행동에서 시작된다.

배우자가 퇴근 후 "오늘 회의에서 내 의견이 무시됐어"라고 말할 때,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눈을 마주치며 듣는 것만으로도 공감은 시작된다.

동료가 "프로젝트 마감에 쫓겨서 잠을 못 잤어"라고 말할 때, 업무를 잠시 멈추고 커피 한 잔을 건네며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공감은 시작된다.

또한 친구가 승진에 실패했다는 소식을 전할 때 "다음에 잘 될 거야"라는 위로보다 "정말 실망스러웠겠다, 많이 준비했던걸 내가 잘 아는데"라고 그 감정을 인정해 주는 것이 더 깊은 공감이 된다.

또한 직장 후배가 "첫 프로젝트라 너무 부담돼요"라고 말할 때, "누구나 처음은 그래"라는 가벼운 위로보다 "첫 프로젝트는 정말 부담스럽지, 어떤 부분이 가장 걱정되는 거야?"라고 물어보는 것이 상대의 감정을 인정하고 더 깊은 대화로 이어질 수 있다.


완벽한 공감은 에베레스트 정복만큼이나 어려울진 몰라도, 불완전한 공감이라도 시도하는 건 충분히 가치 있다.


마치 프로 등산가가 아니더라도 중간 높이의 산에 올라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도 완벽하지 않은 공감으로도 관계의 깊이를 더할 수 있다.

한 걸음씩 오르다 보면, 적어도 평지보다 더 넓은 시야를 얻을 수 있으니까.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의 세계를 조금씩 이해하며, 함께 성장해 나가는 기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part 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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