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좋은 향수 냄새도 누군가에겐 불쾌한 공해일 수 있다.
내가 즐겨 듣는 노래가 주변 사람들에겐 소음 공해가 되기도 하고, 무심코 "얼굴 좋아졌네"라며 건넨 말 한마디가 다이어트 실패로 괴로워하는 친구에겐 어쩌면 꽤 오랫동안 상처로 남기도 한다.
아파트 층간 소음으로 괴로워하는 이웃들, 대중교통에서 큰 소리로 통화하는 사람들, 좁은 도로에서 갑자기 차선을 바꾸는 운전자들, 영화관에서 휴대폰 화면을 밝게 켜는 관람객 등등...
이 모든 상황에서 누군가는 불편함을 느끼고, 누군가는 또 개의치 않는다.
그렇게 우리는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살아간다.
이런 세상에서 과연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사는 것이 가능할까?
문제는 어디서부터 피해라고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카페에서 자리를 넓게 차지하는 단순한 불편함도 피해일까?
아니면 명확한 금전적 손해가 발생해야만 피해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고, 같은 일에도 받아들이는 방식이 천차만별이다.
약속 시간에 5분 늦는 일이 한국인에게는 죄책감을 일으키지만, 스페인 사람들 입장에선 오히려 5분 일찍 온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니 나와 같은 기준을 타인에게 기대하는 것만큼이나, 나와 다른 기준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다.
나의 기준이 결코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서 성숙함이 시작된다.
진정한 문제는 '피해'라는 개념 자체가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 얼마나 불편한지, 그것이 참을 만한 것인지 아닌지는 개인의 경험과 성격, 그날의 컨디션까지 복합적으로 얽혀 결정된다.
누군가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 다른 이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고, 불필요한 불편을 주지 않으려는 태도는 결국 사고의 폭에서 비롯된다.
예의를 갖춘다는 것은 단순히 젓가락을 바르게 드는 법을 아는 것이 아니라, 내 행동이 상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미리 가늠하는 능력에 가깝다.
도서관에서 끊임없이 키보드를 두들기는 사람, 공용 주방에 설거지를 남겨두는 룸메이트, 회의 중에 휴대폰을 계속 확인하는 동료.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예절 교육이 아니라 타인을 인식하는 능력의 확장이다.
우리가 완벽하게 타인을 배려하며 살아갈 수는 없지만, 적어도 스스로 인지 가능한 불편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이 기본적인 매너일 것이다.
지하철에서 큰 소리로 통화하면서 "나 지금 지하철인데"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지하철에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 말을 듣는 다른 승객들도 함께 지하철에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것이다.
혼잡한 거리에서 걸음을 멈췄을 때 뒷사람이 부딪히는 상황, 공공장소에서 휴대폰 알림음이 울렸을 때의 당혹감. 이런 작은 순간들이 모여 우리의 사회적 지능을 형성한다.
배려는 단순히 '양보'의 문제가 아니다.
배려는 때로 적극적인 행동을 요구하기도 한다.
직장에서 동료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도움을 주는 것, 혼잡한 지하철에서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 친구의 힘든 시간에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
이런 행동들은 단순한 예의를 넘어 적극적인 배려의 표현이다.
배려는 또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는 도움이 되는 행동이 다른 상황에서는 간섭으로 느껴질 수 있다.
친구에게 다이어트 조언을 하는 것이 배려인지 무례인지는 그 친구와의 관계, 대화의 맥락, 심지어 그날의 기분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다.
결국 배려는 복잡한 사회적 방정식이며, 이를 완벽하게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이 방정식에 도전하며 더 나은 해법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그렇다고 나 자신을 지나치게 움츠릴 필요는 없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것은 그 누구라도 할 수 없는 일이고, 완벽하게 조심한다고 해서 피해를 주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장 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누군가에게는 그저 존재만으로도 불편함을 줄 수 있으니, 이는 인간관계의 숙명과도 같다.
카페에서 노트북 작업을 하는 동안 배터리가 부족해 콘센트 자리를 찾아 이동해야 할 때, 좁은 공간에서 큰 가방을 메고 있는 상황이나, 버스에서 창문을 열고 싶지만 옆자리 승객이 추워할까 망설이는 순간들.
이런 일상의 작은 선택들이 타인에 대한 우리의 인식 수준을 보여준다.
하지만 지나친 자기 검열이나 완벽주의는 오히려 건강한 관계를 해칠 수 있다.
모든 행동을 피해의 가능성으로 평가하다 보면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완벽한 공존이 아니라 최선의 공존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현실적인 목표일 것이다.
가끔은 우리도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 된다.
피곤한 날 무심코 지나친 말을 했을 수도, 급한 마음에 남의 공간을 침범했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겸손하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의 불편함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관계는 더 건강해질 수 있다.
반대로 우리가 피해를 받는 위치에 있을 때는 상대방의 의도를 먼저 고려해 보는 여유가 필요하다.
의도적인 가해와 무의식적인 불편함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모든 불편함이 피해는 아니며, 모든 피해가 악의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면, 이해하려는 태도만으로도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다.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노력과, 타인의 실수에 조금 더 너그러워지는 태도. 어쩌면 이 두 가지가 공존할 때,
우리는 조금 더 편안한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회적 생활은 결국 끊임없는 타협의 과정이다.
타인의 자유와 나의 권리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
북적이는 도시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불편함을 주고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불편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하느냐가 우리의 삶의 질을 결정한다.
사회적 조화는 정밀한 규칙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관용과 이해에서 비롯된다.
때로는 자신의 권리를 조금 양보하고, 때로는 용기 있게 자신의 불편함을 표현하는 것.
이런 균형을 이룰 때 우리는 보다 조화로운 공존을 이룰 수 있다.
불필요한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하되, 모든 불편함을 피해로 규정짓지 않는 여유.
이것이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지혜가 아닐까.
결국 완벽한 배려는 불가능하지만, 배려하려는 노력과 용서하는 마음은 가능하다.
그것이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법이 아닐까 한다.
작은 불편함을 참고 견디는 인내,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는 사려 깊음,
그리고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넓은 마음.
이러한 것들이 자연스레 어우러질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공존의 미학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다.
그 불완전함 속에서도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을 때, 비로소 진정한 공존이 가능해진다.
완벽하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삶은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하는 삶은 분명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