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V80쿠페 vs 팰리세이드

단 한 번의 삶 #6

by 왈로비
난 예술가의 아내라
영감을 줘야 해

- <뮤지컬 모차르트> 中


아이가 태어날 즈음 차가 필요했습니다. 인생 첫차로 무엇을 선택할까 고민하다가 123마력이면 충분하다고 판단하여 하얀색 아반떼를 구입하였고, '북극곰'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첫차를 받을 때의 설렘은 잊을 수 없습니다. 카 캐리어에 실려 내려오는 모습을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북극곰이는 우리 가족을 어디든 안전하게 데려다주는 고마운 존재였습니다. 실내 공간도 4인 가족이 타기에 넉넉하고 트렁크도 28인치 캐리어 2개와 20인치 캐리어 1개를 실을 수 있을 정도로 널찍하였습니다. 차체도 1,300kg 정도로 무겁지 않다 보니 도심에서는 12~13km/L, 고속도로에서는 20km/L이 나올 정도로 연비도 좋았습니다. 또한, SUV에 비해서 차체도 크지 않다 보니 도심에서 주차하기에도 부담이 없었습니다. 북극곰이는 저희 가족이 타고 다니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차였습니다.




첫째 아이는 소방차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소방차의 색인 "빨강"을 좋아합니다.

컵도, 가디건도, 킥보드도, 자전거도, 헬맷도 아이가 선택할 수 있는 물건은 모두 빨강입니다.


어느 날부터 아이는 빨강차를 타고 싶어 했습니다. 빨강차를 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부모로서 아이의 모든 것을 들어줄 수는 없지만, 들어줄 수 있는 것은 해주고 싶었습니다. 아이가 빨강차를 타면 얼마나 많은 영감을 받을지 무척이나 기대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래핑을 알아보았습니다. 아반떼를 빨강으로 래핑 하는데 약 200만 원 정도가 필요하였습니다. 그러나 래핑은 소모되는 비용이라 선뜻 실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 차를 바꾸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보다 빨강차를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아이가 원하는 소방차의 "레드"를 가진 차량을 대부분 스포츠카였습니다. 그러다 발견한 차가 바로 'GV80쿠페'였습니다. '마우나레드'라고 하는 컬러는 딱 보아도 아이가 원하는 빨강임에 틀림없었습니다.


문제는 비용이었습니다. GV80쿠페는 차 가격만 1억 원이었습니다. 카드사의 60개월 할부를 이용한다면 가까스로 구매가 가능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차 가격뿐만 아니라 취득세 및 공채 등 다른 비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취득세 623만 원에, 공채할인으로 내는 비용까지 하면 65만 원이 더해져 약 688만 원을 추가로 지불해야 했습니다. 2자녀로서 7인승 이상의 차를 사면 취득세 50% 감면이 되는데 GV80쿠페는 5인승으로 70만 원의 감면 혜택 밖에 받지 못하는 것도 아쉬웠습니다. 아반떼는 1.6리터 엔진에 5년이나 지나서 자동차세가 약 23만 원 정도 들었는데, GV80 쿠페는 3.5리터 엔진이어서 91만 원을 내야 했습니다. GV80쿠페는 공차중량이 2300kg으로 아반떼보다 더 무겁고 엔진의 용량도 크기에 복합연비도 7.8km/L에 불과하여 기름값도 아반떼의 2배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이것저것 따져보니 차 가격 외에도 5년간 이자, 기름값 및 자동차세 등 유지비를 계산해 보니 천만 원이 훌쩍 넘었습니다.


모든 비용을 엑셀로 정리해 보니 합리적이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고, 아이에게 멋진 빨강차를 사주는 것은 포기하였습니다.




최근 자전거 대회인 '양평 그란폰도'에 출전하였습니다. 보통은 혼자 그란폰도에 다녀오기에 자전거 앞바퀴를 제거한 상태에서 아반떼의 2열에 싣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이번 대회는 키즈바이크대회에 첫째 아이가 참가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란폰도는 8시에 출발하고, 키즈바이크는 10시에 시작이어서 저만 먼저 지하철을 타고 양평으로 새벽같이 출발하였고, 이후 아내와 아이들은 차를 타고 대회장으로 왔습니다.


이 날은 그란폰도에 참가한 날 중 가장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아이와 아내도 키즈바이크 시작을 기다리다가 비를 피하기 위해 차 안에 머물렀습니다. 키즈바이크 대회가 끝나고 아빠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비가 내려서 차 안에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차가 조금 더 커서 아내와 아이가 편하게 차 안에서 쉴 수 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회가 모두 마무리되고 인근에 샤브샤브를 먹으러 갔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은 차를 타고 갔고, 아반떼에는 자전거가 실리지 않아서 저는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였습니다. 샤브샤브를 맛있게 먹고 원래는 다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빠와 함께 있고 싶은 아이들이 같이 지하철을 타고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과 자전거를 가지고 지하철을 타고 2시간 동안 간다는 것은 그란폰도 완주보다 더 어려워 보였습니다. 결국 예전 TV프로그램에서 경차에 몇 명이 탈 수 있는지 도전하는 것과 같이, 아내가 운전을 하여 운전석을 최대한 당기고, 첫째는 조수석에, 둘째는 카시트에 태우고, 운전석과 카시트 사이에 자전거 앞바퀴를 빼서 넣고 시트 위에 자전거 뒷바퀴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뒷좌석 자전거와 조수석 사이 공간에 제가 구겨져서 앉음으로써 기적처럼 차를 타고 집에 올 수 있었습니다.




이날 이후 자전거대회에 참가하는 동안 가족들이 편하게 쉬고, 자전거를 실어도 가족들이 편하게 이동하며, 최근 우리 가족이 된 강아지도 함께 다닐 수 있는 큰 차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큰 차에 대한 필요성이 생긴 이후 여러 차들을 알아보다가 '팰리세이드 하이브리드'를 눈여겨보게 되었습니다. SUV 중에 가장 큰 사이즈에 속하고, 2톤이 넘는 자체임에도 하이브리드 엔진으로 인해 연비가 14.1km/L로 아반떼와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가격도 가장 낮은 등급(익스클루시브)으로 선택하면 물론 비싼 가격이지만 5천만 원대이고, 9인승이어서 개별소비세가 없고 다자녀 혜택으로 취득세도 50% 할인을 받을 수 있었으며 공채비용도 친환경차이기에 면제되었습니다. 비록 자동차세는 기존보다 조금 더 내야겠지만 유류비는 현재와 거의 비슷할 것이기에 유지비는 큰 차이가 없을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GV80쿠페와 비교하면 상당히 합리적으로 보였습니다.


다만, 문제는 차의 색상이었습니다. 차를 바꾸게 된 계기는 아이가 좋아하는 "빨강"이었습니다. 그런데 팰리세이드는 빨강이 없었습니다. 가장 유사한 색상이 '갤럭시 마룬 펄'이라는 어두운 와인색 또는 버건디색이었습니다. 전시된 차가 없나 하남스타필드 등을 가보았지만 '갤럭시 마룬 펄'이 전시된 곳은 없었습니다. 실물을 보지 못한 아이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빨강이 아니어도 괜찮냐고. 아이는 더 큰 차라면 괜찮다고 했습니다.


'팰리세이드 하이브리드'를 덜컥 계약하였습니다.




새 차를 받고 기대되는 가족의 첫 시승이었습니다.


천호자전거거리에서 주최하는 '가을바람 라이딩 챌린지'에 아이와 함께 참가하려고 하였습니다. 기존 아반떼에는 저의 자전거와 아이의 자전거를 같이 실을 수 없었지만 팰리세이드는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현관에서 신발을 갈아 신다가 눈물을 흘리면서 큰소리로 우는 것이었습니다. 빨강차가 아니라면 기존에 익숙했던 북극곰이를 다시 타고 싶다고. 새 차는 빨강도 아니고 북극곰이도 아니어서 싫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차. 순간 모든 것이 잘못되었음을. 길을 가다가 운동장에서 날아온 축구공에 갑자기 머리를 꽝 하고 맞은 것처럼.


아이가 원했던 빨강차를 산 것이 아니라, 내가 원했던 차를 그냥 산 것이었습니다. 목적이 전도되었습니다. 여섯 살 아이에게 영감을 주고자 했던 마음에서 차를 바꾸기로 하였지만, 이리저리 엑셀파일을 굴리며 아이가 원했던 '빨간색 GV80쿠페'를 외면하고, 필요했던 큰 차이자 합리적인 '팰리세이드 하이브리드'를 산 것입니다. 아이에게 괜찮냐고 물어봤을 때 괜찮다고 답한 아이의 말은, 사실 직접 그것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좋은지 싫은지 알 수 없음을 알았음에도 듣고 싶었던 답변이라 괜찮을 것이라 치부해 버린 것뿐이었습니다.


몹시나 후회되었습니다. 선택을 할 때 언제나 더 합리적(reasonable)인 소비를 하고자 했습니다. 물건을 사든 중요한 결정을 하든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합리적인 소비에 필요와 편의는 있지만 기쁨과 만족감은 없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샀을 때는 한 없이 기쁜 마음이 솟구칩니다. 인간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이성이 아닌 감성이기 때문입니다.




해야 할 이유 한 가지와 하지 말아야 할 이유 수백 가지.


하지 말아야 할 이유 수백 가지보다,

해야 할 이유 한 가지가 더 중요합니다.


이번 자동차 구매에서 연비, 차량가격, 취득세 등 엑셀파일을 이리저리 굴리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할 이유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아이가 좋아하는 빨강차를 사는 것은 해야 할 이유입니다.


해야 할 이유, "본질"을 잊고 말았습니다. 아이에게 빨강차를 타게 해 줌으로써 영감을 주고, 진정 원하는 것을 얻는 경험을 해주겠다는 본질.


이번 선택에서도 어느 순간 해야 할 이유는 사라지고, 하지 말아야 할 이유로 고민하다 가장 합리적이고 필요해 보이는 선택을 했고, 늘 그렇듯 후회하게 되었습니다.


Don’t be trapped by dogma.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도그마에 빠지지 마세요. 마음을 따르지 않을 이유는 없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스탠포드 졸업식에서 했던 말입니다. 잡스에게는 애플을 하지 말아야 할 수백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도그마에 빠지지 않고, 컴퓨터를 좋아하는 단 하나의 해야 할 마음으로 선택하고 결정하고 앞으로 나아갔을 것입니다.


잡스의 말과 같이 중요한 선택을 할 때 하지 말아야 할 이유로 도그마에 빠지지 않기를,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그 선택과 결정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기를,

그럼으로써 진정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에필로그]

최근 강화도를 다녀왔습니다. 80km 정도의 거리였지만 추석 연휴여서 그런지 3시간이 넘게 걸렸습니다. 정체가 심했음에도 저속구간에서 전기를 사용하는 팰리세이드 하이브리드의 연비는 무려 17.3km/L가 나왔습니다. 선택의 중요한 고려요소였던 만큼 연비가 좋았습니다.


첫 째 아이는 1열 조수석에 앉았다가 카시트에 탄 동생과 함께 2열에 앉았다가, 다시 자신의 방처럼 꾸며놓은 3열에 앉으면서 차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닙니다. 강화도 여행에서도 집으로 오는 길에 조수석의 시트를 최대한 눕혀도 2열이 불편하지 않기에 편하게 자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여전히 보보(새 차의 이름)가 좋지 않다고 말합니다. 때로는 빨강차가 지나가면 빨강차를 타면 얼마나 기쁠까 혼잣말을 합니다. 저 역시도 넓은 공간, 좋은 연료 효율이 편하기는 하지만 기쁘거나 만족스럽지는 않았습니다. 차의 크기, 연비는 우리 가족의 자동차 구매라는 결정에 있어 부수적인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다시 선택의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연비가 나쁘더라도 공간이 작더라도 아이와 제가 진정으로 원했던 '빨간색 GV80쿠페'를 선택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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