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한해

단 한 번의 삶 #7

by 왈로비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나름의 이유로 불행하다.

- 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中


#2025년 1월

첫째 아이의 만 5살 생일 즈음, 소아과에서 영유아검진을 받았습니다. 다행히 소아과에는 시력을 간이로 검사하는 기계가 있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작년 영유아 검진에서도 난시가 심하다고 안과에 가보라고 했지만, '아이의 시력은 원래 좋지 않은 거고 서서히 좋아지는 거지. 곧 괜찮아지겠지'라며 애써 외면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내가 병원에 꼭 가봤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아내의 아이에 대한 감과 연속되는 의사 선생님의 경고를 무시할 수 없어, 안과에 갔습니다.


아이가 안과 검사를 잘 받을 수 있을까 걱정도 많이 되었지만 아이는 생각보다 침착하게 검사를 잘 받았습니다. 그리고 운명을 맞닥뜨려야 할 시간. 난시가 심하다는 안과 선생님의 소견. 덧붙여 난시가 심하여 약시가 약간 있고, 나중에는 약시가 치료되지 않을 수 있기에 지금 꼭 안경을 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직 5살밖에 안된 아이가 안경을 써야 하다니. 청천벽력과 같았습니다.


첫째 아이가 태어날 때 9평 남짓의 빌라에 살았습니다. 빌라의 창문은 아이의 키가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있었고 그마저도 창문을 통해 옆 빌라의 벽만 볼 수 있었습니다. 이 맘 때쯤 사진을 다시 보면 마음이 아팠습니다. 해도 잘 들지 않고 창으로는 아주 가까운 벽 밖에 볼 수 없는 상자 같은 환경으로 인해 아이의 눈이 정상적으로 자라지 못한 것은 아닌가 부모로서 아이에게 참으로 미안했습니다. 안과 선생님은 난시의 원인은 모른다고 작은 빌라 때문은 아닐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로서 좋은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난시가 생겼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아이의 난시는 가난으로 인해 좁디좁은 공간에서 아이를 키운 부모의 잘못 같았습니다.




#2025년 6월과 7월

6월 유럽 출장 전 날, 막내 처제가 <진격의 거인>을 좋아할 것이라며 추천해 주었습니다. 예전부터 보고 싶었던 애니메이션이기도 하고, 긴 비행에서 무료함을 달래줄수도 있을 것이기에, 아이패드에 시즌 1을 10여 편 담아갔습니다. 출국하는 비행기에서는 주로 출장에서 해야 할 업무들을 정리하곤 했습니다. 워낙 긴 비행시간이기에 모든 정리가 끝나도 시간이 많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아이패드에 담아두었던 <진격의 거인>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스토리 자체가 철학적이고 생각할 거리도 많았기에 금세 담아두었던 회차를 모두 보았습니다. 그렇게 <진격의 거인>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는 마음이 참으로 힘든 시기였습니다. 그렇기에 뭐라도 집중할만한 것이 필요했고, 그 탈출구로 <진격의 거인>을 쉼 없이 보았습니다. 퇴근하고 육아를 하면 밤 12시가 넘었습니다. 통상 이때 잠을 자는데 우울감을 떨치기 위해 잠을 쪼개가며 새벽 2시 넘어까지 애니메이션을 보았습니다. <오징어게임>도 보지 못할 정도로, 잔인하고 폭력적인 것은 보지 못하는 성격이었음에도, 이토록 잔인한 애니메이션을 밤새 붙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7월의 어느 날, 미용실에 갔습니다. 미용사 선생님이 머리를 보시더니 머리 위쪽 모발 상태가 이상하다고 빨리 병원에 가보라고 하였습니다. 수면부족과 잔인한 영상에 지속적으로 노출됨으로 인해 스트레스가 과다하게 쌓였고 결국 탈모가 찾아온 것 같습니다. 피부과에서 스테로이드 주사를 2주 간격으로 7번이나 맞았습니다. 평소 머리숱이 많아 머리에 대한 걱정이 없었는데, 인생 처음 탈모로 인해 마음고생이 심했습니다. 자신감도 많이 떨어졌습니다. 누군가 머리를 보고 비웃지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첫 발병 이후 4개월이 지난 지금도 머리숱이 적은 부분이 있는데 영영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할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진격의 거인> 마지막 시즌을 남겨두었지만, 탈모로 인한 걱정으로 더 이상 영상을 볼 수 없었습니다.




#2025년 5월, 9월, 10월

2024년 '춘천 그란폰도'에 처음 참석한 이후, 천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경치 좋은 곳을 함께 달리는 그란폰도의 매력에 푹 빠졌습니다. 올해는 상반기 5월 '가평 그란폰도'와 하반기 9월 '충주 그란폰도'를 신청하였습니다.


5월, 가평 자라섬 그란폰도의 코스는 동부 5고개를 넘는 악명 높은 코스였습니다. 거리는 130.6km이고, 획득고도가 무려 2,441m였습니다. 그러나 춘천 그란폰도의 경우 메디오(짧은 거리)를 타고 이제 2번째 그란폰도에 참석하는 초보에게 거리와 획득고도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더군다나 각 지점마다 도착시간을 계산하여 페이스를 조절하는 "타임시트"가 있어야 된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그렇게 타임시트도 없이 보급소마다 시간을 허비하고, 경치 좋은 곳에서 사진을 찍는다고 또다시 소중한 시간을 흘려보냈습니다. 타임시트를 보고 시간이 안 되겠다 싶으면 그란폰도가 아닌 메디오폰도로 방향전환을 했어야 하는데 그러한 인지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마냥 페달만 열심히 밟았습니다. 그러나 눈앞에서 기다리는 것은 "회수차"였습니다. 그란폰도는 도로를 통제하기 때문에 제한된 시간 안에 특정 지점을 지나가지 못하면 더 이상 달리지 못합니다. 그것을 컷오프(Cut-off)라고 합니다. 첫 그란폰도 코스 도전에 컷오프 당하여 회수차를 탔습니다. 회수차 안의 분위기는 매우 무거웠습니다. 패배감과 함께 회수차를 타고 창문 밖의 풍경, 컷오프 당하지 않고 열심히 달리는 다른 참가자들을 바라보았습니다. 표정은 힘들지만 환희에 찬 그들의 모습이 부러웠습니다. 대회장에 도착하여 자전거를 받아보니 프레임의 가운데 부위에 아주 커다랗고 깊게 파인 자국이 생겼습니다. 트럭에 자전거를 실을 때 뒷사람이 MTB 자전거였는데, 날카로운 페달에 부딪혀 상처가 났습니다. 회수차 탄 것도 억울한데 산지 1년도 되지 않은 친구와 같은 소중한 자전거에 상처가 나니 마음에도 흉터가 남았습니다. 이와 더불어 저지 뒷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에너지젤로 인해 사이클링컴퓨터(가민)와 블랙박스가 끈적끈적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첫 그란폰도 도전은 대실패였고, 자전거에 대한 자존감도 많이 떨어졌습니다.


9월, 무려 11만 원의 참가비를 내고 '충주 그란폰도'를 신청하였습니다. 회수차를 다시는 타지 않기 위해,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이번 그란폰도는 만반의 준비를 하였습니다. 지난번 실패를 교훈 삼아 타임시트를 만들었습니다. 자전거로 출퇴근하며 훈련도 열심히 하였습니다. 119km의 거리를 달리기 위해 초코바, 연양갱, 에너지바 등도 가득 채웠습니다. 자전거와 옷도 차에 미리 실어두었습니다. 아침에 먹을 음식도 부엌에 두고 잠을 청하였습니다. 대회 당일 잠을 잘 자서 컨디션도 좋았습니다. 비가 조금 많이 오기는 했지만, 비로 인해 포기할 열정이 아니었습니다. 오전 7시 반 충주에 도착하기 위해서 5시 반 집에서 출발하였습니다. 한 20분쯤 달리다 문득 "헬멧"을 안 챙겼다는 사실이 생각났습니다. 규정상 헬맷이 없으며 그란폰도에 참가할 수 없었습니다. 전날 자전거와 옷을 차에 실을 때 헬맷을 챙기려 하였으나 깜빡하였습니다. 혹여나 헬맷을 놓고 갈까 아침밥 옆에 헬맷을 두었으나 어두워서 보지 못하였습니다. 낭패였습니다. 서둘러 집으로 차를 돌렸으나, 결국 1시간 가까이 늦고 말았습니다. 운영요원은 본인들이 책임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번호표를 떼고 달리라고 하였습니다. 번호표를 떼니 기록도 없었고, 대회의 이방인처럼 느껴졌습니다. 코스도 원래 예정된 119km의 그란폰도가 아닌 67km의 메디오폰도를 탔습니다. 너무 아쉽고 실망스러웠습니다. 100km 넘는 그란폰도에 도전해보고 싶었는데, 의도치 않은 실수로 모든 것을 망쳤습니다.


10월, '충주 그란폰'도의 실수가 무척이나 아쉬웠습니다. 이대로 올해를 마무리할 수 없었습니다. 서둘러 접수할 수 있는 대회를 알아보았는데, '금산 그란폰도'가 아직 접수 중이었습니다. 집에서 조금 멀기는 하였지만 심기일전하여 도전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금산 그란폰도'는 온 가족이 함께 갔습니다. 혹여나 가평 그란폰도 때처럼 완주하지 못할까 타임시트도 퍼플렉시티를 이용해 만들어 자전거에 붙여두고, 충주 그란폰도 때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 체크리스트도 만들었습니다. 헬맷은 미리 차에 넣어두고 몇 번이나 확인을 하였습니다. 금산까지는 2시간 넘게 가야 하기에 새벽 5시에 자고 있는 아이들을 깨워 출발하였습니다. 아내가 고맙게도 금산까지 운전을 해주어 편하게 쉬면서 갈 수 있었습니다. 금산에 도착하니 구름이 끼고 약간 쌀쌀한 듯하였지만 약 10도 정도로 해가 없어 올해 마지막 자전거 대회에서 자전거를 타기 환상의 날씨였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했습니다.


그러나 자전거 프레임과 앞바퀴를 조립하려고 하던 때. 아차! 하는 생각이 들면서 완벽해 보였던 금산 그라폰도 도전은 엉망이 되었습니다. 대회 전날, 차를 바꾼 이후 처음으로 자전거를 트렁크에 싣었습니다. 큰 차이기에 당연히 앞바퀴를 분리하지 않고도 실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로드자전거는 거대했습니다. 자전거 앞바퀴를 분리하고 끙끙대며 간신히 자전거를 차에 싣었습니다. 문제는 트렁크에 실려있던 짐들을 정리하기 위해 자전거와 앞바퀴를 연결하는 "QR(Quick Release) 레버"와 공구를 나중에 챙기자는 생각에 잠시 바닥에 둔 것입니다. 온통 생각이 자전거 싣기에만 집중되어 있었기에, 주차장 바닥에 있던 자전거와 앞바퀴를 연결하는 중요한 QR 레버는 금산으로 함께 가지 못하고 그대로 그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대회장의 운영진과 자전거 공식 수리소에 가서 사정을 말하고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도와줄 수 없다는 답변뿐이었습니다. 결국, 올해 심혈을 기울여 도전한 '금산 그란폰도'는 가족들을 모두 대동하고 준비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지만, 이해할 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연속된 실수로 출발조차 하지 못하였습니다.


스스로가 너무 한심하고 실망스러웠습니다. 준비하고 기대했던 만큼 실망도 컸습니다. 그토록 좋아했던 자전거인데, 이제는 로드 자전거가 꼴도 보기 싫어졌습니다. 이 날 이후 로드자전거를 타본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 그란폰도에 다시는 참석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즐거움을 위해, 성취감을 위해 시간과 돈과 노력을 들여 참석하는 그란폰도이건만, 오히려 스트레스만 쌓였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중요한 축이었던 '자전거'가 한순간에 무너졌습니다.




이처럼 올 한 해를 돌아보면 인생에서 손꼽히는 '최악의 한해'였습니다.


첫째 아이는 안경을 쓰게 되었고,

난생처음 겪는 탈모로 심한 마음의 상처가 남았고,

그란폰도에서의 어이없는 세 번의 실수로 인해 그토록 좋아했던 자전거가 싫어졌습니다.

이 이외도 올해는 유사한 일들이 수없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마음은 늘 불안하고, 우울감에 시달렸습니다.




독서모임 플랫폼 <그믐>의 창업자이자, <암과 책의 오디세이> 팟캐스트를 운영하는 김새섬 대표의 블로그 글입니다.

여러분 덕분에 '오늘 점심, 저녁 무얼 먹을까' 고민하는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닫고 있습니다."


비록 되는 일 하나 없는 최악의 한 해를 보냈지만, 김새섬 대표의 말처럼 요새는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에서 오는 감사함을 느낍니다.


첫째 아이는 다행히 존경하는 소아과 선생님을 만나 난시를 일찍 발견했고, 좋은 안과 선생님을 만나 정확한 도수를 처방받았고, 아이가 빨간색을 좋아한다고 하니 수소문해서 공수해서 준비해 준 안경원에서 멋진 빨간 안경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 아이는 조금 불편해하긴 하지만 좋아하는 "에그박사"가 안경을 쓰기에, 안경 쓰는 것에 거부감이 없었습니다. 모든 이들 덕분에 기적처럼 기존에 있었던 약시가 완전히 나았습니다. 안과 선생님은 지금과 같이 안경을 잘 쓰면 약시가 생길일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요새는 회사일이 힘들어도 퇴근하는 저녁 시간만 손꼽아 기다립니다. 매일 아내와 저녁 뭐 맛있는 거 먹지 하면서 메뉴를 고민하는 게 좋습니다. 가끔 첫째 아이가 안 자고 기다리면 아이는 식탁에서 에그박사 책을 읽고, 아내와 함께 하루 종일 고민했던 저녁을 맛있게 차려먹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연시와 요거트, 카카오빈 등 디저트를 쉼 없이 먹습니다. 배가 터질 때까지 먹고 나면 우리 집 막내 "구름이"와 아파트를 돌며 산책을 합니다. 가을밤 산들산들 바람이 참 좋습니다.


10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은, '이용' 또는 '아이유'의 <잊혀진 계절>을 들으며 목청껏 따라 부를 수 있는 유일한 날이어서 샤워하면서 마음껏 듣고 불렀습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10월의 마지막 밤을. ~~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아침에 아빠가 자고 있는 방으로 와서 부비며 노는 첫째와 둘째 아이의 "꺄르륵" 소리에 절로 웃음이 납니다.


하루 종일 회사에서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다 집으로 돌아온 저녁. "나 혼자 산다"를 보며 아내가 요리해 준 저녁을 같이 먹으면 그렇게 마음이 편안할 수 없습니다.


인생 별거 없습니다.

대단하지도 않습니다.

완벽히 준비했던 일이 한순간의 사소한 실수로 마지막 조각만 남겨두고 무너지는 도미노처럼 와르르 엉망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한 해가 망할 수도 있습니다. 내년이 잘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점심, 저녁 무얼 먹을까' 고민하는 평범한 일상이 있어 참으로 고맙고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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