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 시절은 혼자서 버텨낸 흔적이 많다. 외동으로 태어나 부모의 가르침 없이 많은 변화를 이겨냈으니 사회화가 되는 방식이 차이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짓궂은 친척들의 장난에 마음이 상할 때면 방구석에 틀어박혀 잠들기 일쑤였던 시절, 나 이외 누군가를 향한 마음을 가질 여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작은 사회를 겪으며 질투와 시샘을 배웠다. 갖지 못한 것들을 쉽게 가지는 이들이 부러웠다. 어렸을 때의 결핍은 성인이 되어서도 지울 수 없다고 했던가, 특정 물질에 대한 집착은 아마 이때부터 생겼던 것 같다.
청소년기를 지날 때까지도 문화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괜스레 조급함이 밀려와 친구들 사이에서는 부끄럽고 싶지 않았다. 가깝지 않았던 학교 선배가 고맙게도 약간의 도움을 주었고, 시작을 바탕으로 혼자서 많은 것을 배워갔다. 영화관도 카페도 음식점도 어색한 발길을 내딛는 게 싫어 익숙해지기 위해 굳이 집 밖을 나섰다.
겉과는 다른 미숙한 태도를 지녔지만 고마운 사람들을 만났다. 나이를 떠나 많은 것을 배우게 해주었고, 삶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남부럽지 않은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크리스마스에 초대된 파티도, 계획 없이 빠졌던 바다도, 문이 닫혀있던 상가 거리의 모습도 세상을 배우는 과정 중 하나였다.
이타적인 모습이 생겼다. 혼자 타지에 와서 살고 지내던 친구가 걱정되어 한동안은 무거운 생각이 머릿속을 차지했다. 때때로 불편함을 감수하며 남을 위하기도 한다. 학습된 배려는 타고난 모습에 비해 다듬어지지 않은 면이 있지만 변화를 겪었기에 더 나아질 것을 믿는다.
이전과 반복된 경험을 얻는다. 소중한 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소개해 주고 함께하는 시간을 갖는다. 지나온 내가 느끼는 것은 많은 감사함이다. 혼란에 빠져 지냈을지도 몰랐던 삶에 많은 길을 알려준 이들은 스스로 이타적인 모습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