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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allflower Apr 03. 2017

<미녀와 야수>는 무엇을 놓쳤나

요정의 저주는 여전히 ‘벨’을 향해 있다


미녀와 야수 공식포스터. 출처 공식사이트.

 2017년 상반기 화제작은 단연코 <미녀와 야수>다. 원작은 1991년 장편 애니메이션으로는 최초로 아카데미 후보에 올랐던 디즈니의 클래식. 주목할 점은 이 고전 영화의 히로인으로 배우 엠마 왓슨이 캐스팅됐다는 점이다. 감독 빌 콘돈은 이 캐스팅을 두고 ‘21세기 여성상’으로서의 벨을 표현하는 데 엠마 왓슨이 적격이었다고 언급했다. 결국 클래식의 실사화에서 디즈니가 세운 야심찬 목표 중 하나는 주인공 ‘벨’의 21세기화였던 셈이다.




디즈니 공주들과 다른 ‘벨’


 디즈니의 대표적인 클래식 애니메이션은 동화로 귀결된다. 1930년 처음 제작된 장편 애니메이션 <백설공주>를 필두로<신데렐라>, <인어공주> 등 동화의 애니메이션화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주된 흐름이었다. 이 애니메이션들이 제시해 온 여성관은 ‘수동성’으로 정리된다. 백설공주와 신데렐라, 그리고 인어공주의 에리얼마저 난관으로부터 자신을 구해줄 왕자님을 기다린다. 심지어 사랑을 위해 가족이 있는 터전은 물론 자신의 목소리마저 포기하는 에리얼이 보여주는 것은 ‘사랑’없인 살 수 없는 여성상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미녀와 야수>의 ‘벨’은 달랐다. ‘벨’은 넓은 세상을 향해 모험을 하고 싶고 아버지를 지키고 싶다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다. 그녀는 마을의 유일한 ‘책벌레’로 책을 통해 모험에의 열망을 해소하며 살아간다. 야수와 춤을 추며 사랑을 확인한 순간에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내뱉는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성으로 향하는 마지막 모습까지, ‘벨’이 상징하는 여성상은 오히려 능동적이기까지 했다.


성으로 아버지를 직접 찾아온 벨. 덕분에 필립(말)은 쉬지도 못하고 달렸다. 출처는 공식 스틸컷.


요정의 저주는 벨을 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7년 <미녀와 야수>는 실패작이다. 이 영화에는21세기의 여성상이 반영된 ‘벨’이 없다. 21세기 여성상이란 무엇인가. 여성을 향한 코르셋을 벗어던진 자유로운 여성이다.그러나 이 영화가 1991년을 답습했다고밖에 볼 수 없는 이유는 여전히 ‘아름다운’ 벨 때문이다. 그녀는 마을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며, 이는 성 안 사람들에게도 인정받는 사실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속 여주인공들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조건인 ‘아름다움’은 이렇게 계승된다. 아름다움은 결코 앞으로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여성에 대한 최후의 기대다.


 이 영화의 서사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외면만을 중시했던 왕자에 대한 요정의 저주다. 그러나 영화에서 야수는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벨’에게 반한다. 그녀가 갖고 있는 책에 대한 갈망, 넓은 세상을 모험하고 싶은 욕구나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모두 그 다음에나 유효하다. 오히려 야수라는 외면에 가려진 왕자의 내면을 바라볼 줄 알게 되는 것은 ‘벨’이다. 그녀는 야수의 모습을 한 왕자의 난폭함을 달래고, 감금을 인내하며, 상처를 치료한다. 심지어 외면을 보고 무서워하는 동네 사람들에게 그의 다정한 면을 설득하는 것도 벨이다. 그렇게 야수에 가려진 착한 마음씨를 보고 나서야 그녀는 왕자와 결혼식을 올리는 행복한 결말을 맞는다. 이러한 ‘벨’을 보는 소녀들에게 닿을 메시지는 1991년판 <미녀와 야수>와 결코 다르지 않다. 이쯤되면 ‘사람의 내면을 보라’는 요정의 저주는 1991년과 마찬가지로 2017년판 <미녀와 야수>에서도 야수가 아닌 ‘벨’을 향한 것이 아닐까?



그녀의 아름다움을 아침부터 찬양하는 마을 사람들. 그리고 일편단심 개스톤. 역시 출처는 공식사이트


엠마 왓슨이라는 브랜드에 기댄 ‘벨’

 실패작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벨’이 살고자 했던 세상은 그녀 스스로만드는 것이 아니라 야수로부터 만들어진다. 그녀의 책에 대한 갈망은 야수가 그녀를 도서관으로 데려가줄 때 충족되며,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은 욕구 역시 야수의 요술 거울을 통해 발현된다. 그녀의 어머니가 죽은 이유조차 어린 시절의 파리로 돌아가게 만들어 준 야수의 지도 덕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조차 야수가 개스톤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올 때까지 ‘벨’은 발만 동동 구를 뿐이다.


 페미니스트를 선언하고 UN에서 성평등에 관한 연설을 한 사람은 엠마 왓슨이지 ‘벨’이 아니다. 결국 디즈니가 만들어내고 싶었던 21세기판 ‘벨’은 엠마왓슨이라는 개인의 브랜드에 기댄 것일 뿐,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에도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나마 이 영화의 ‘벨’이 페미니스트로서의 엠마 왓슨을 닮았다고 찾아낼 수 있는 면모는 고작 해야 드레스에서 ‘코르셋’ 입기를 거부했다는 후일담뿐이다.




 르푸 역의 조시 게드는 한 인터뷰에서 엠마 왓슨이 연기한 ‘벨’이 그의 딸들에게좋은 역할 모델이 될 것이라고 답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소녀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한 세기가 지났어도 변하지 않았다. 자신 있게 장담하던 조시 게드의 인터뷰는 러닝타임 내내 공허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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