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앰 히스 레저>
“등이 강한 사람은 자신이 가진 자산이 많은 사람들이에요.”
뭐랄까. 몸의 앞부분은 남들에게 보여지는 부분이라 감정이 많이 감춰져 있지만 등은 날 것 그대로의 나를 담고 있는 곳이라고했다. 소심한 아이들 중 등짐지기를 잘하는 아이들은 좋은 잠재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가진 게 없고, 이룬 게 없어도 자신감 넘치는 사람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이 등이 강한 사람들이다.
<아이 엠 히스 레저>의 히스 레저를 보고 있자니 ‘등이 강하다’는 말이 저절로 떠올랐다. 새삼스럽게 질투 같은 감정도 느꼈던 것 같다. 스스로에게 어떻게 저렇게까지 무한한 신뢰를 보낼 수 있나. 그러나 결국 마지막으로 떠오른 느낌은 공감이었다. 이러나 저러나, 나와 같은 불완전한 인간임을. 이래저래 흔들리는 갈피 같은 삶 속에서 묵묵히 걸어간 사람임을. 그렇기에, 불안한 누군가에게 이 영화는 위안이 된다.
호주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못하는 게 없었다. 그가 10살쯤 되었을 때, 도저히 체스를 이길 수가 없었다고 그의 아버지가 말했다. 누나의 영화를 맨 앞에서 지켜보며 빨리 커서 자기도 하고 싶다며 꿈을 키운 소년. 그는친구가 졸업하기만을 기다렸다가 곧장 시드니로 향했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배우가 됐다.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를 소개시켜 줬다는 대표도 그가 주인공 패트릭 역을 땄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했다. “정말 주연을 땄다고?” 주위 사람들이 반신반의하는 순간에도 그는 하고자 하는 것들 것 대부분 손에 넣는다. 우상이던 멜 깁슨과 함께 찍은 영화 <패트리어트>에 캐스팅 되는 것까지 완벽하다.
아니 뭐가 이렇게 쉬워? 나는 순간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당시를 회상하는 히스의 친구는 “늘 작품을 할 때마다 하차를 고민했다.”는 이야기를 한다. 자신이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다면서 말이다. 불안을 겪어본 사람들은 모두 다 알지 않나. 하루에도 몇 번씩 나를 뒤흔드는 불안에 대해서 말이다.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지만 내 마음 속에서 내가 나에게 너는 안될 놈이라고 소리치고 있는 그 폭풍. 그러니까 아직 저 때까지만 하더라도 히스의 등은 완전히 강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물론 나는 아직도 폭풍에 등이 휘영청휘영청 한다.) 어쨌거나,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글쎄. 나도 폭풍에 여러 번 휩싸여 봤는데 그렇게 되면 사람은 보통 몸을 사리게 된다. 사실 실패할까 두렵고 망할까 두렵고 그래서 가장 안전한 길, 다시 말해 내가 가봤거나 남이 가본 길을 걸어간다. 또 다른 길로 갔다가 폭풍이 폭풍 때리기를시전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히스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마치 늘 ‘다른 사람’ 같을 수 있는 캐릭터를 찾았다고 한다.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의 성공 이후 그에게 들어온 로맨틱 코미디 대본이 모두 거절당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그는 로맨틱 코미디에서 기사 윌리엄으로, 그리고 게이 카우보이로, 너무나 다른 캐릭터들 사이를 종횡무진했다.
그가 이런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에게 결코 떨어지지 않았던 '카메라'가 있다. 찍을 게 없으면 발이라도 찍으라며 결코 손에서 놓지 않았던 카메라. 그는 호텔에서 나가 다른 건물로 들어가는 짧은 거리를 마치 스파이 악당이라도 된 듯 연기를 하며 지나간다. 신기한 건 그렇게 연기를 하고 있으니 복도를 지나가는 다른 호텔 숙박객이나 직원들이 뭐라도 숨긴 사람들처럼 보였다는 점이다. 어쨌든 매일의 노력과 타고난 담력. 그는 이것을 토대로 역할 속에 흠뻑 빠져들 수 있는 배우로 성장해 나간 듯 하다.
“나는 두려워하면서도 그것을 해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장애물을 세워두고 그것들을 부숴버리는 것 말이에요. 두려워하는 게 좋아요. 언제나 그래요."
그러니 이쯤부터는 그의 인생이 결코 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쉬운 게 아니라, 그만큼 열심히 살아서 결실을 맺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또 두려워서 도망쳐 오거나, 늘 도망칠 길을 한 편에 마련해두고 어느 것에도 올인하지 못했던 내 삶에 대한 뼈아픈 후회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는 드디어 그를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에 올려놓은 <다크 나이트>의 조커 역을 맡는다. 그는 6주 동안 호텔에 틀어박혀 조커의 일기를 쓰고 자학을 하는 등 조커의 연기 구상을 치밀하게 했다. 크리스토퍼 놀란에 따르자면 혀를 날름거리던 것은 보형물이 떨어질 때마다 어쩔 수 없이 하던 행동이었는데 나중엔 캐릭터의 일부가 됐다고 한다. 모든 것을 쏟아부어 조커와 혼연일체가 됐던 그는 <다크 나이트>의 촬영이 끝나고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완벽했어.”
모든 것을 쏟아 부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대사다.
안타깝게도 그는 <다크 나이트>가 개봉하기 전 세상을 떠난다. 감기와 우울증으로 고생해 약을 한꺼번에 복용한 것이 사인이라고 한다. 당시 나이 28세였다.
용산 CGV에는 <아이 엠 히스 레저>를 위한 미니 전시관이 있다. 그곳도 그렇고 영화의 포스터, 영화의 홍보 문구는 모두 ‘청춘’을 향하고 있다. 사실 나는 청춘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싫은 것이, 청춘만 도전을 하는 것도 아니고 청춘이라고 해서 또 도전하고 장애물을 부숴야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청춘을 위한 영화라고 적고 싶진 않다.
다만, 꿈이 있는 사람을 위한 영화는 맞는 듯 하다. 자신이 소망하고 있는 꿈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영화랄까. 방법은 간단하다. 미칠 듯한 자기 확신. 주위 사람이 응원을 하든 비난을 하든 자신만을 믿고 달려야 한다. 결코 쉽지는 않다. 원래 엄마아빠보다 더 설득하기 어려운 것이 나 자신의 마음이다. 수십번을 '나는 할 수 있다'고 외쳐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기 비하가 시작되는 것이 내 마음이니 말이다. 그러나 그래도 해야 한다. 결국 등에 자산을 지고 있는 사람은 나다.
“어떤 일에 대해 내가 좋다고 말한다면, 그건 다른 무언가를 시작해야 하는 날입니다.” 부지런도 하다.
불안에 시달리고 그걸 극복하고, 또다시 불안에 시달리길 반복하는 젊은 나이의 어느 시점을 청춘이라고 이름 붙인다면 그가 살다 간 모든 생애는 청춘이란 이름을 붙여도 나쁘진 않으리라. 누구보다 찬란하되 누구보다 외로운 시간. 그의 시간은 끝났지만 이제 그걸 견디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