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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터 Oct 30. 2023

매일 늦는 길치라도 괜찮아요

이왕 늦은 거 천천히 가죠 뭐

하루는 친구와 저녁 약속을 가던 길이었다. 2호선에서 3호선으로 갈아타고 운이 좋게 자리에 앉았다. 핸드폰을 켜서 집을 나올 때부터 쓰던 에세이의 뒷부분을 이어서 써 내려갔다. 그렇게 한참 핸드폰을 양손으로 붙잡고 글을 쓰다가 도착할 때가 된 것 같아 카카오톡을 열었다. 친구한테 두 개의 문자가 와 있었다.


"어디니?"

"고속버스터미널에서 길 잃었니?"


고속터미널역만 가면 어쩐 일인지 길을 잃어서 밖으로 나가기까지 30분 넘게 걸린다거나 본가로 내려가는 버스 타는 곳을 찾지 못해서 사방을 뛰어다니곤 했다. 다행히 이미 3호선으로 열차를 갈아탔기 때문에 잘 가고 있다고 곧 도착한다고 말할 작정이었다. 지도 앱을 켜서 어디쯤 왔나 확인해 보니 지도에서 가리키는 길과 정반대로 가고 있었다. 심지어 글 쓰는 것에 심취해서 5 정거장이나 와버린 것이었다. 친구에게 사실을 알리니 친구는 이렇게 답했다.


"반대로 탔니...?"

"고향 안 간 게 어디니^^"


길치 친구 기다려주는 착한 친구 1


나와 오랫동안 본 친구들은 항상 내가 늦을 것을 염두에 두고 약속을 잡았다. 특히 서울에서 만나는 거라면 길을 잃어버리거나 버스 지하철을 반대로 타는 경우가 많았다. 잘 놀고 헤어질 때가 되면 나에게 꼭 물어봤다. 집에 잘 갈 수 있지? 헤매다가 막차 놓치면 큰일 난다. 나는 “이제 서울에서 산 지도 9년 차야! 잘 갈 수 있어!”라고 호언장담을 하고는 30분 뒤 친구한테 문자를 보낸다.


"나길 잃어버린 듯"


그래서 내가 길을 잃어버리거나 버스를 반대로 타는 일은 너무나 당연해서 나의 착한 친구들은 분노하기보단 어휴 또 저런다는 식의 한숨만 내뱉는다. (어쩌면 포기했을지도?)


인천에 사는 친구의 집은 주안인데 거기는 출구가 아주 애매하다. 1호선에서 내리면 올라가는 계단과 내려가는 계단이 양쪽에 있는 데 항상 그 친구의 집으로 갔던 길이 떠오르지 않는다. 언제는 올라갔던 것 같고 언제는 내려갔던 것 같은데.라는 생각으로 이리저리 헤매고 있으면 친구한테 연락이 온다.


"왜 거기로 갔어! 그냥 가만히 있어 내가 갈게."


친구는 날 만나면 항상 “어휴 야 맨날 오는데 어떻게 맨날 모르냐.”라고 꾸짖곤 한다. 생각해 보면 나는 모든 것에 느렸다.


길치 친구 기다려주는 착한 친구 2


말하는 것도 느리고 먹는 것도 느리고 걸음도 느린 편이다. 나와 통화를 하면 많은 사람이 답답해하곤 하는데 질문에 내가 답하기도 전에 그들이 묻는다. 듣고 있어? 내 입장에서는 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너무 템포가 빠른 것이 아닌가 싶다. 거기에 길치에 방향치까지 더해지니 느린 걸음에 방향까지 잃는 나를 친구들은 항상 그러려니 해왔다.


나도 길을 잘못 들었거나 방향을 잃을 때마다 정말 당황스럽긴 하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내려서 반대 방향으로 가면 되니 매번 길을 잃어버리는 게 힘들지는 않았다. 그래서 늦어도 길을 잘못 가도 항상 여유 있는 발걸음을 유지하며 살아왔는데 삶의 태도는 그러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영화를 찍으면 영화제에서 상영하고 싶기도 했고 혹시 이 길이 나의 길이 맞는지 혹시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계속 자신을 의심하며 살아왔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를 설득하기에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써버렸고, 나는 그렇게 주저하면서 앞으로 달렸다. 길을 잃으면 찾으면 되고 잘못하면 다시 잘 찾아가면 되는데 뭐가 그리 두려웠던 걸까. 맨날 가는 길도 잃어버리면서 인생의 길은 한 번에 옳은 길로 가고자 그리도 아등바등 살았던 걸까. 만약 길을 잃었다면 다시 찾아가도 된다. 그러니 그 길로 걷는 여정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 길이 맞을지 주저하지 않기로 했다. 만약 진짜 잘못한 것이라도 심지어 그 안에서 헤맬지라도 길은 언제든 다시 찾으면 되니까 말이다. 매일 길을 잃은 나를 묵묵히 기다려 주었던 친구들처럼 나 자신을 기다려 주기로 했다.


23.07.05

호찌민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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