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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터 Nov 05. 2023

취업 대신 제주도 한 달 살기

충동적인 선택이 후회된다면, 잠시 묻어둘 시간이 필요하다.

이력서를 집어던지고 제주도 비행기 티켓을 예매한 건 나조차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취업 준비를 하던 그때는 지원 분야와 관련된 학원의 수료를 마친 참이었다. 학원 동기들은 포트폴리오를 정리하고 취업 상담을 받으며 여러 회사에 지원했다. 나도 그들을 따라서 취업 준비를 하고 있긴 했지만 잘하고 있는 건지 답답한 마음이 들쯤 한 동기가 말했다.


“취업에 성공하고 나면 이렇게 여유롭게 지낼 수 있는 날은 없을 거야.”


지원한 회사에서 연락이 오지 않아도 낙심하지 말자고, 오히려 지금의 여유를 즐기자는 긍정적인 위로의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나에겐 하고 싶은 걸 도전해 볼 마지막 기회라는 의미로 다가왔다. 회사를 다니게 되면 가장 하지 못 할만한 일이 무엇일까 고민해 보니 장기여행이란 답이 나왔다. 하지만 한 달 넘게 여행을 가기엔 학원을 다니느라 모아둔 돈을 다 써버려서 금전적 여유가 없었다. 한 달이면 숙박비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나올 텐데 역시 빨리 취업해서 돈이나 벌어야 하나 고민했다. 그때 제주도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하며 한 달 살기를 하는 게 유행이라는 기사를 봤다. 회사 지원서를 넣을 때는 위치, 연봉, 회사의 규모 등 이것저것 따지는 것도 많았으면서 게스트하우스 스탭에 지원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1시간 정도였다. 심지어 지원하고 합격 통보를 받는 대까지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력서를 쓰다가 말고 당장 제주도로 가게 된 것이었다.


B게스트하우스의 테라스


B게스트하우스를 고른 건 단지 테라스 때문이었다. 게스트하우스에 딸린 테라스로 나가면 협재 바다가 손에 닿을 듯한 거리에 있었다. 아침엔 물이 저 멀리까지 빠져서 해변을 산책할 수도, 저녁엔 테라스 바로 앞까지 물이 차서 마치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느낌이 마저 들었다. 심지어 파티 스태프로 갔기에 청소를 하지 않아도 되고, 만약 파티가 있는 날이면 테라스에서 게스트들과 시간을 보내는 게 할 일의 전부였다. 매일 같이 만나는 새로운 사람들, 휴무 날에 또래 스탭과 함께 하는 제주도 여행, 마음껏 눈으로 담을 수 있는 협재 해변까지 너무나 좋은 시간이었지만 당시에는 마냥 좋지만은 않았었다.


비양도가 보이던 협재 해변


취업에 성공한 사람들, 혹은 면접을 준비 중인 동기들의 연락을 받으면 어쩐지 잘 못된 선택을 한 것만 같았다. 다들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나만 뒤처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취업을 앞두고 있던 동갑 스탭에게 물었다. 여기에 온 것에 만족하냐는 질문이었다. 그 친구는 이렇게 답했다.


“여기 온 걸 후회해.”


이유는 주변 친구들과 부모님의 반응 때문이었다. 취업이 확정되고 입사 전에 제주도 게스트하우스에서 한 달 정도 시간을 보내겠다는 친구를 다들 말렸다고 했다. 지금이 너무나 중요한 시기라고, 취업에 확정이 되었지만 남은 기간을 잘 보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돌아가서 영어 공부라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단다. 취업에 확정돼서 입사 날짜만 기다리면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결국 우리는 그 한 달 동안 제주 살이를 온전히 즐기지 못하고 오지 않을 미래에 두려워하고 있었다. 또 우리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걱정하면서 말이다. 만약 그 선택이 잘못된 것이라고 해도 고작 인생에서 한 달이란 시간만 잘못된 거면서.


해변에서 했던 불꽃놀이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때 취업 대신 제주도로 떠난 건 내 인생에서 잘한 일 베스트 10위안에 드는 일이다. 만약 그때 제주도 한 달 살기를 가지 않고 취업을 했었다면 내 인생이 지금과 많이 달랐을 거라고 생각한다. 낯선 곳에서도 잘 적응해 나갈 수 있다는 것, 세상엔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한 달이란 짧은 기간에 알게 되었으니까. 그 경험이 용기가 되어 또 한 번의 제주도 한 달 살기, 태국 한 달 살기, 한 달간의 유럽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또 그곳에서 보냈던 시간을 함께 추억할 친구가 생겼다는 것으로 너무나 값진 시간이었다. 물론 여행으로 인해 100원 한 장까지 탈탈 써버려서 서울에 돌아가서 고생을 좀 하긴 했지만 말이다. 고작 취업이 한 달 정도 늦어진 것과 취업 후 월급을 받기 전까지 아슬아슬한 생활을 했던 것에 비하면 너무나 많은 것을 얻었던 시간이었다. 그때 바로 취업했으면 얼마나 끔찍했을까 가끔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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