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오마주한 빈티지 웨딩 스냅 작업일지
반복되는 일상에서 지겨움을 느끼던 찰나에 재미있는 일을 하고 싶은 욕구가 솟아올랐다. 그런 기분이 들 때마다 내가 쓰던 방법은 학원을 등록하는 것이었다. 나의 직업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를 배우면 삶의 의지가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얼마 전에 구매한 노트북 할부가 끝나지 않아서 학원비를 감당할 수 있는 재정 상태가 아니었다. 그러던 중에 한 친구가 나에게 웨딩 스냅 사업을 해보라고 제안했다. 결혼을 준비하던 친구였고 웨딩 사진 찍는 업체를 찾아보다가 나에게 제안해 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나는 영상 pd이지만, 영상보다 사진을 할 때 더 즐거움을 느꼈다. 영상과 사진 중에 무엇이 더 좋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영상은 금전적인 대가를 받고 하는 일이기 때문에 사진이 더 놀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무턱대고 시작하기엔 사진을 전문적으로 배운 것도 직업도 아닌 사람이 웨딩 스냅을 갑자기 시작한다고 해서 누가 나에게 찍히고 싶겠냐는 불안감이 들었다. 이 일을 시작할지 말지 고민하던 나에게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너 그거 못할 거야. 웨딩 스냅은 신부랑 신랑 비위도 잘 맞춰야 하고. 무엇보다 넌 서비스 직종이랑 안 맞아.”
그 말을 듣고 그런가? 무턱대고 시작했다가 망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일을 시작했을 때 망한다면 벌어질 최악의 상황은 무엇일까 떠올려 봤다. 시작하게 된다면 장비가 필요하겠지, 그리고 의뢰자를 구해야겠지. 장비는 이미 가지고 있었으니, 의뢰만 받으면 되는데 의뢰자가 아무도 없으면 내가 보는 손해는 어느 정도일지 고민해 본 결과 금전적인 손해는 하나도 없었다. 장비를 새로 구매해야 하는 것도 아니니 초기 자본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었고, 10년 넘게 개인적으로 사진 작업을 해왔으니, 무언가 새롭게 배워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니까 내가 이 일을 시작해서 망하게 되면 생길 최악의 상황은 초반 준비에 쓴 나의 시간을 날린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준비 과정에서 내가 분명히 새롭게 배우는 부분도 있을 터였고, 나라는 사람이 어느 부분이 취약하고 강점은 어떤 부분인지 알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 일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망한다고 가정했을 때 최악의 상황이 이전보다 더 많은 경험과 내가 들일 노력뿐이라면 도전하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그 확신이 들고 나서 바로 웨딩 스냅을 해보라고 제안했던 친구에게 연락했다. 모델이 되어 달라는 나의 제안에 다행히 그 친구는 흔쾌히 수락해 주었고, 우리는 함께 작업을 하기로 했다.
이제 다른 업체들과 차별화될 부분을 정해야 했다. 나는 햇빛이 잘 들고 헤어, 메이크업, 드레스까지 대여 가능한 스튜디오가 있는 것이 아니니까. 나만의 느낌을 살린 사진을 주력으로 삼아야 했다. 그러다 생각한 점이 영화를 오마주 하는 방식이었다. 일반 웨딩 사진과 다른 느낌이었으면 하고, 나와 예비 의뢰자가 떠올리는 이미지의 간극을 줄일 좋은 방법이었다. 의뢰자는 한 편의 영화를 정하면 그 안에 있는 장면들로 콘셉트를 잡고 레퍼런스를 정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친구가 정한 영화는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였다.” 하지만 영화를 레퍼런스로 삼으니, 의상이 문제였다. 시대와 지역이 다르니 영화 속 의상을 그대로 따라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영화 속의 장소와 포즈만 참고하기로 하고 작업일이 되었다.
솔직히 촬영 날까지 너무나 걱정이 되었다. 친구의 웨딩 사진을 망칠까 봐 불안했다. 필름 카메라로 찍다 보니 현장에서 결과물을 바로 확인할 수 없다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혹시라도 필름이나 카메라에 문제가 생겨서 오늘 촬영본 전체를 날리면 어쩌나 전전긍긍했다. 또 필름 사진, 디지털사진, 영상까지 다 해봐야겠다는 나의 욕심과 달리 사진만 찍는 것에도 엄청나게 긴 시간이 걸려서 영상을 찍을 여유가 없었다. 영상용 시나리오도 만들어놔서 장면만 잡으면 되었지만 역시 계획과 실행은 큰 간극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침 11시에 시작한 스냅 촬영은 오후 4시쯤 끝이 났다. 친구 커플도 옷을 갈아입느라 장소별로 짐을 옮기며 이동하느라 녹초가 된 듯 보였다. 나도 힘이든 터라 집에 가서 바로 쉬려고 했지만, 결과물이 걱정되어서 바로 sd 카드를 노트북에 연결했다. 다행히 결과물은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친구 커플은 전문 모델이 아님에도 자연스러운 표정과 보여줬고 사진 속엔 너무나 사랑스러운 두 사람이 있었다. 원본 사진을 친구에게 보낸 후 보정할 사진을 골라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마음이 두근거려서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당장 내가 고른 사진으로 보정 작업을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보정이 심하게 들어간 사진을 좋아하지 않아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잡티를 지우고 피부 톤과 전체적인 색감 보정을 하는 게 전부였지만 너무나 즐거웠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자정을 넘기도록 작업에 몰두했다.
필름 사진까지 스캔하고 나니 너무나 행복해서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어쩌면 이 작업을 한 게 올해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일 중의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말했듯 이 사업이 생각처럼 잘 되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내가 살아가는 것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 어떤 점인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일하는 과정에서 내가 좋아하는 일 혹은 내가 잘하고 싶은 일이라면 아무리 상황이 열악하고 힘들더라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근데 이번 작업은 나의 사진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것이기도 했지만, 친구의 중요한 사진을 잘 담아내고 싶었다. 또 내가 잘하고 싶어 하는 분야인 사진은 스스로 어떤 방식으로 찍어야 할지, 렌즈와 구도 등을 공부하는데 즐거움이 일이었기에 모든 과정에 행복하게 임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 시작이 열정이 사그라들어, 혹은 의뢰자를 구하지 못해도 충분하다. 이번의 경험으로 나는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할 때 내가 좋아하는 일인가 아니면 내가 잘하고 싶은 일인가를 고민하고 선택할 테니까. 그것만으로 너무나 가치 있는 일이었다.
23.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