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차 직장인, 은행나무 냄새를 좋아하게 되다.

도시에 지친 직장인과 은행나무 냄새의 연관성

by 리리안

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겨울이 찬바람으로 손짓한다.

성수동 출근길, 매일 지나가던 그 거리에 줄지어 서 있던 은행나무들이 노랗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사람들이 은행을 밟지 않으려 애쓰는 뒷모습을 보는 건 소소한 즐거움이다.

그러던 중, 남들이 피해 다니는 은행 냄새를 나만 오히려 즐기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모두가 기피하는 냄새를 좋아하게 된 건 무척 신선하고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혹시 나 같은 사람이 있을까 싶어 인터넷 검색을 해봤지만,

‘은행 냄새가 왜 고약한가’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주를 이뤘다.

빌로볼과 은행산. 생전 처음 들어보는 낯선 단어들을 공부했고,

그것이 동물과 곤충으로부터 종자를 보호하기 위해

은행나무가 만들어낸 화학 성분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인간 입장에서 은행 냄새가 좋지 않은 이유는 명확했다.

애초에 은행나무가 그렇게 하려고 만든 냄새니까.


그런데 왜 나는 이 냄새를 즐기고 있는지,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었다.

원래 이런 취향을 가진 적이 없었다.

향수처럼 뿌리고 다니고 싶은건 아니지만, 묘한 쾌감을 주는 냄새.

어째서 은행 냄새는 나에게 그런 자극을 주는 걸까?

‘은행 도파민’이라니. 지구상에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원체 한 가지에 꽂히면 이상한 것이라도 계속 파고드는 성격이라

한동안 이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원래 좋아하지 않던 냄새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최근의 내 삶과 맞닿아 있었다.

5년 차 직장인이 된 후로 일은 늘어나고 책임도 커졌다.

그렇다고 똑 부러지게 일을 잘하는 편도 아니라서

한동안은 나 자신을 자책하던 시기였다.

일을 잘하고 싶지만 잘하지 못했고, 즐기고 싶었지만 즐기지 못했다.

결국 ‘이 일이, 아니, 지금의 생활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결론에 닿았다.

인정하기 싫었던 진실을 마주하자

그때부터 내 인생이 회색 인간의 범주에 속해버린 것만 같았다.


스스로 먹고살기 위해 도시로 왔지만,

사실 나는 도시와 잘 맞지 않는 사람이다.

일도 일이지만, 서울 생활이 나와 맞지 않는 게 더 컸다.

내 고향은 사과로 유명한 농사지역으로,

고층 업무시설을 보는건 하늘의 별 따기였다.

하늘은 너무 높지 않은 곳에 있었고, 길목 어디서나 은은하게 풍겨오던 풀 향기는

밥을 먹듯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아침에 집 앞 산책을 나가면 수달이 보이기도 했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자연마저 품기 위해선 돈이 필요한 곳이다.

한강이나 서울숲 근처는 무지막지한 땅값을 자랑한다.

멋진 뷰까지는 바라지 않아도,

사람이 없는 고즈넉한 시간을 가지려면

남들보다 더 많이 가져야 하는 게 모순 같은 현실이다.


앞으로 내 인생이 회색 인간의 범주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참고 인내하면 뭐라도 될 거라 믿었지만,

5년이라는 세월이 그 믿음에 닿기엔 짧은 건지,

그 세월을 기다리기엔 내 인생이 짧을지—무엇 하나 알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맡은 은행의 쿰쿰하고 쨍한 냄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콘크리트와 적벽돌로 점철된 도시에서

내가 유일하게 만끽할 수 있는 ‘자연’이었다.

은행 냄새는 너무나 정직해서, 농촌에서도 도시에서도 늘 같은 냄새니까.

이렇게라도 잠시 해방된 기분을 얻고 싶었던 게

조금은 웃기면서도, 조금은 슬프게 느껴졌다.


‘은행나무 도파민’에 대한 결론을 내리자,

앞으로는 나의 행복에 좀 더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5년 동안 ‘일’이라는 이름 아래 온갖 핑계를 대 왔다.

“일이 바빠서 못해.” “일이 바빠서 안 돼.”

그렇다고 일을 잘한 것도 아니었다.

번아웃을 반복한 5년이었다.

이대로 살다간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일에 일 순위를 두지 않으려 한다.

물론, 내 책임을 다하는 선에서.

이제는 내가 내 생활에 지쳤다는 걸 인정했으니,

조금씩이라도 나아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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