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 유어 달링>, <길 위에서>, 그리고 내 친구 Saphira
*작년 가을 무렵 작성했던 글입니다*
지난 4월부터 시작된 독일에서의 교환학생 생활. 교환학생으로 파견된 모든 학생들은 Orientation Week의 마지막 날, 원하는 수업을 자유롭게 수강 신청할 수 있었다. 나에겐 독일에 오기 전부터 1순위로 듣고 싶었던 수업이 있었다. 다름 아닌 'The Literature of the Beat Generation', 즉 비트 시대 문학 수업이었다.
비트 시대를 이끌었던 '비트족'은 1920년대 미국 대공황의 시대에 태어나 세계 2차 대전을 경험했고, 이후 미국 사회를 휩쓴 물질주의와 사치스러운 사회 분위기에 반항감을 느끼고 기존 사회 관념과 구조에 저항하며 자신만의 자유를 추구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글을 쓰고, 재즈 음악에 춤을 추고, 방랑가와 모험가적 기질을 지녀 주류 가치관을 강력히 거부하곤 했다.
사실 내가 비트 문학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곤 비트 시대의 대표적인 문학가 앨런 긴즈버그와 루시엔 카의 이야기를 다룬 실화 기반의 영화 <킬 유어 달링>, 그리고 민음사에서 출판된 주황색 표지의 책 <길 위에서>. 단지 이 둘 뿐이었다.
<킬 유어 달링>은 매혹적이고 퇴폐적인 분위기를 지닌 영화로, 포스터 속 데인드 한의 반항적인 모습에 이끌려 고등학생 시절 봤던 영화이다. 영화 속 자유분방하고 예술적인 두 주인공의 삶이 그저 너무 멋있게만 보였다. 그들이 서로의 생각과 영감을 나누고, 글을 쓰고, 시를 읽고, 사랑에 빠지는 모습은 내게 비트 문학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기 너무도 충분했다.
배경음악으로 계속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재즈음악은 내 마음을 쉽게 일렁이게 만들었고, 심지어 후반부에 그들이 맞이한 비극은 왠지 모르게 낭만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렇게 나는 비트 문학에 대한 무한한 동경을 품게 되었다.
우리의 찌그러진 여행가방이 다시 인도 위에 쌓였다. 아직 갈 길이 멀다. 하지만 문제 되지 않았다. 길은 삶이니까.
이후 <길 위에서>라는 소설을 알게 되었다. 책의 뒷 표지에 쓰여 있던 위 문장에 홀려 나는 책을 냉큼 구매해 버렸다. 하지만 독일에 가기 전 다 읽고 가지 못했다. 의외로 술술 읽히지 않았다. 내가 생각했던 내용과는 많이 달랐고, 무모하고 대범한 길 위에서의 이야기가 정신없이 펼쳐지는 탓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저 들뜨고 설렜다. 한국에서는 비트 문학에 대한 수업이 존재하지도 않을뿐더러, 이번이 아니라면 평생 듣지 못할 수업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강의라면 아마 백 번이고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긴장되고 떨리는 수업 첫날. 교수님은 젊은 30대 분이셨고 좋은 인상을 가지고 계셨다. 총수강생은 20명 남짓이었다. 첫 오티 시간엔 비트 세대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을 듣고, 다음 주 수업까지 책을 구매해 오라고 하셨다.
교수님께 어디서 구매하면 좋을지 묻고, 아마존에서 구매를 한 뒤 일주일 만에 두 책을 얻었다. 독일에서 처음 주문해본 택배였기에 수령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었지만, 책이 내 두 손에 도착했을 땐 그저 행복하기만 했다. 케루악과 앨런 긴즈버그의 글을 원문으로 읽게 되다니. 펭귄북스 출판사의 책인 것도 맘에 들었다.
새 학기 넘치는 열정으로 나는 매일 자기 전 매일 책을 머리맡에 두고 조금씩 읽었다. <길 위에서>를 먼저 읽었는데, 내 간절한 소망과는 달리 잘 읽히지 않았다. 한국어가 아닌 영어인 데다가, 한국말로 읽어도 산만했던 얘기들은 원문으로 읽으니 특유의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극대화되었다.
한 문장이 너무 길기도 했고, 오디오북도 들어가며 열심히 노력했지만 그래도 버거웠다. 아직 영어로 읽는 건 역시나 무리였던 건가, 생각도 들었다. 결국 책 전체를 다 읽어가지는 못했기에 아쉽기만 했다.
교수님은 책을 읽어 올 시간을 3주 정도 주셨기에, 그 이전까지는 주로 비트 문화와 대표 작가들에 대해 배우곤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시간은 비트 시대에 유행했던 여러 재즈음악을 들으면서 서로 감상평을 나누는 것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재즈 노래를 이렇게 수업시간에 귀 기울여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고, 음악에 대한 친구들의 감상을 다양하게 들을 수 있었다는 것도 너무나 좋았다.
창밖에는 나른한 오후의 햇살이 비쳐 들고 있었다. 정말 입꼬리가 귀에 걸릴 만큼 신나서 나는 수업 내내 싱긋거리며 노래를 들었다. 좋은 노래가 나오면 음악 검색 어플로 노래를 검색해보기도 하면서.
어떤 곡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말하던 내 뒷자리의 남자 학생은 정말 목소리와 말투가 데인드 한과 너무도 비슷했다. 등 뒤편으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마치 <킬 유어 달링>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 아이는 늘 맑은 눈동자로 수업을 들었다. 진중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얘기하는 친구였다.
비트 문학 수업 첫날. 우리는 다 같이 네모나게 둘러앉아 4곡의 재즈를 연달아 감상했고, 뒷자리에서 발표를 열심히 하던 남자아이는 정말이지 데인드 한의 그 어눌하고 매력적인 목소리와 꼭 닮아있어 수업 내내 <킬 유어 달링> 영화 속에서 숨 쉬는 듯한 기분이었다.
비트 문학 시간, 나는 운이 좋게도 내 옆자리에 앉은 친구와 친해지게 되었다. 나에게 "Hallo, Are you from South Korea?"라고 묻길래 나는 맞아,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독일 일본 혼혈인이라고 했다. 엄마가 일본인, 아빠가 독일 사람이라고. 친구의 이름은 Saphira. 중, 고등학교는 일본에서 다니다가 대학은 독일로 왔다고 했다. 자기는 일본에서의 학교생활이 너무 힘들었다고, 지금의 삶이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Saphira의 전공은 음악(피아노)였고, 현재 영문학을 복수 전공하고 있어 비트 문학 수업을 선택했다고 했다.
나도 한때 피아노를 전공하고 싶어 했고, 음악을 좋아하기에 Saphira와 더 빨리 친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한번은 "독일에서 빵을 주로 먹다 보니 밥과 한식이 너무 그리워"라고 말을 건네자, 그녀도 내 말에 공감하며 자신도 밀가루를 먹으면 소화가 잘 안된다며 밥을 자주 해 먹는다고 했다. 그 말에서 얼마나 큰 동질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동양인의 피가 흐르고 있나 봐.
매 수업시간마다 나는 그 친구와 함께 앉으며 외롭지 않은 수업시간을 보냈고, 다른 친구들과 얘기도 할 수 있었고 이런저런 도움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정말 따뜻하고 정감 있는 친구였다. 수업 중간중간 모르는 부분도 자주 물어보고, 쉬는 시간에 얘기도 나누고, 팀플도 같이 하고, 집을 같이 걸어가거나 드럭스토어에서 쇼핑을 하기도 했다. 친구는 모든 수업시간에 열심히 참여하며 차분하게 의견을 얘기했는데, 나도 그 모습에서 좋은 영향을 받아 좀 더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독일 수업에서 가장 놀랐던 사실은 교수님이 수업 전부를 진행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는 교수가 100% 강의식으로 수업을 하거나, 때론 팀 프로젝트 과제를 내주어 학생들이 수업 중간중간 돌아가면서 PPT와 함께 발표를 하곤 한다.
하지만 독일에서 교수는 그저 수업의 방향을 이끌어 주고, 학생들의 질문에 답하고 내용을 보충해주는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수업은 교수님이 어떤 주제에 대해 질문을 던지면, 학생들이 너도나도 자발적으로 열심히 손을 들어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이야기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학생들끼리 서로 질문을 던지고 답변하기도 하고, 부족한 내용은 교수님이 추가적으로 설명을 해주고 정리해 주는 식이다. (물론 경영, 경제학 등의 수업은 강의식으로 진행되었다)
어떤 수업은 100% 학생들의 팀 프로젝트로 이루어졌다. 교수님의 목소리만 왕왕 울려 퍼지는 한국의 강의실과는 아주 상반된 분위기였다. 가장 대단하다고 느낀 건 수업에 참가하는 모든 학생들이 열정적이라는 것이었다. 모두가 수업시간에 참여하고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의견을 주고받고, 책의 주인공과 내용 등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아주 적극적으로 열심히 이야기했다.
단 하나의 정해진 정답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각자의 모든 의견은 정답이 될 수 있었고, 서로의 다양한 의견을 듣고 그에 대답하며 생각을 점차 넓혀나갈 수 있었다. 나도 그런 분위기를 틈타 한두 번 손을 들고 얘기를 했다. 한국에서라면 사람들의 시선에 부끄러워서 시도하지도 않았을 일이다.
독일은 대학 진학률이 3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너무도 높은 80% 이상의 대학 진학률을 지니고 있다. 한국은 사회적 인식 때문에라도 억지로 성적에 맞춰서라도 꾸역꾸역 대학에 가지만, 이곳에는 정말 이 전공을 공부하고 배우고 싶어 하는 학생들만 대학에 진학한다.
그래서인지 이곳 학생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높은 확률로 대학원을 진학한다. 대학교에서 자신이 원하는 분야를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더 깊게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정말 공부하고 싶은 아이들만 대학교에 오니 수업 분위기는 당연히 좋을 수밖에 없다.
심지어 독일은 학비도 거의 무료다. (독일은 1학기에 30만 원 정도만 지불하면 학생증을 발급해 주고 그걸로 도시 내 모든 교통수단을 무료로 탑승할 수 있다) 이런 환경 덕분에 독일에서 참신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는 걸까, 하고 생각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한 달 정도 지났을까, 비트 문학 수업을 같이 듣던 Saphira는 내게 메신저로 연락을 보내왔다. 잘 지내고 있느냐고. 음악 전공 수업 기말 과제로 노래를 만들었는데, 너한테 들려주고 싶다고 내게 동영상을 보내주었다.
노래에서는 친구의 잔잔한 피아노 소리와, 드럼, 그리고 간간이 트럼펫 소리가 들렸다. 가사는 슬프고 애잔한데 노래는 한없이 다정하기만 했다. 내 마음까지 덩달아 따스해졌다. 친구에게 너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