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함께 슬픔 앞에 멈추어 서서
마치 오래 전 지키지 못했던 약속처럼 늘 내 마음속에는 서평을 써야 한다는 혼자만의 압박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 압박감은, 어쩌면 이 책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해소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예소연 작가의 <영원에 빚을 져서>를 읽고 나니, 내게 남은 단편적인 기억들을 글로 남겨두고 싶었다.
습작을 위해 많은 소설을 읽고 싶어도 아직은 역사책, 철학책을 먼저 읽어야 한다는 왠지 모를 강박에 시달리는 내게 <영원에 빚을 져서>과의 만남은 우연과도 같았다. 서점에서 외근을 하던 중 우연히 들춰 본 것이 시작이었다. 그렇게 내가 펼쳐 본 페이지는 예소연 작가의 ‘작가의 말’이었는데, 작가는 소설 맨 뒤편에 이렇게 썼다.
이 소설을 쓸 때 즈음 저는 사랑하는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슬픔에 줄곧 젖어 있었습니다. p.144
‘슬픔’과 ‘죽음’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나를 잡아끄는 힘이 있다. 정작 처절하게 누군가의 죽음을 경험해 본 적도 없으면서.
잠시 잠깐이라도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일을 계속해서 해나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p.145
작가는 차창 너머 말간 하늘을 바라볼 때, 새가 아주 높이 날고 있을 때, 앞으로는 강건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다짐을 할 때 마음속으로 죽은 사람을 호명한다고 했다. 얼마나 슬프고, 슬프기에 아름다운 표현인지. 여기까지 읽고 나는 이 책을 소장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 순간, 작가의 마지막 말이 그 마음을 결심으로 바꾸었다.
곰곰 생각해 보면 슬픔은 정말 제 동반자 같기도 합니다. …그것이 삶이라고 한다면 저는 정말 빚진 것이 많습니다. 저를 가끔 기쁘게 하고 많이 울게 한 모든 것에 말입니다. 그 모든 것들에 고맙습니다. p.146
슬픔이 동반하는 것이 삶이라면, 그 삶에 빚진 것이 많다고 말하는 작가가 쓴 글이란 어떤 것일까. 이미 ‘영원에 빚을 져서’라는 제목에서부터 이 책은 내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이 책은 실종된 친구를 찾아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3일째 되는 날에 화자 ‘동이’는 친구 ‘혜란’으로부터 또 다른 친구 ‘석이’가 캄보디아에서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동이는 처음에 그 소식을 믿지 않는다. 그에게 석이는 늘 보편적인 행운을 단단히 쥐고 있는 친구였으니까. 처음에 읽으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이 묘사는, 책장을 넘길수록 우리가 얼마나 우리 자신의 시선에 묶여 타인의 다른 면을 바라보려 하지 않는지 보여 준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지난날의 기억을 성급히 묻어두면 안 되는지도. 그렇게 석이를 찾아 떠나야겠다고 다짐한 동이와 혜란 앞에 과거의 이야기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인다.
셋의 인연은 대학생 시절 캄보디아 해외봉사 프로그램에서 시작된다. 바울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함께 지내게 된 셋은 2014년 4월 일어난 믿을 수 없는 참사를 생중계 화면으로 접하고부터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동이는 석이가 학생인 ‘삐썻‘과 남다른 관계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한다. 이렇듯 셋의 과거는 곧 흘러넘칠 물잔처럼 아슬아슬하게 묘사된다. 하지만 현재의 동이는 석이를 찾는 여정에서, 그리고 석이를 찾으면서 만난 삐썻에게 이야기를 들으면서 혜란과 함께 서서히 변화를 겪는다. 시간 속에 겹겹이 쌓인 오해들을 풀어나가면서, 석이가 참사를 겪으며 어떻게 변화해 나갔는지 알게 되면서 ‘문제의 층위를 따져서 파고들 것과 아닐 것을 구분하며 마음을 다잡는 사람이었던’ 동이 자신도 점점 스스로의 무심함을 후회하게 된다.
세월호 참사처럼 캄보디아에서도 있었던 국가적인 재난 꺼삑섬 참사, 이태원 참사, 킬링필드 등 세상에서 거듭 일어나는 참사로 괴로워하는 석이를 이해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인 우리 역시 어느새 자연스레 이 모든 재난과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책의 첫 목차가 ‘연루’인 이유다. 그렇게 <영원에 빚을 져서>라는 책의 제목은, 그 슬픔 앞에서 우리가 함께 지게 된 책임, 즉 빚을 말하는 듯하다. 때문에 작가는 자신을 ‘가끔 기쁘게 하고 많이 울게 한’ 삶에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슬퍼하는 이들을 보며 내가 느꼈던 슬픔 그 너머에 있던 알 수 없는 부채감의 얼굴을 마주한 것 같다. 그렇게 진 빚을, 조금씩 갚아나가야 할 이유를 다시금 깨닫게 해준 아름다운 책이다.
*기억나는 문장들(발췌)
“…벙은 울고불고하면서도 이제는 행복해졌다고 했어요. 그런데 나는 그게 거짓말인 걸 단번에 알았어요. 행복한 사람은 그렇게 쉽게 행복하다고 하지 않거든요.” p.41
“너 요즘 힘들어?” “어, 힘들어. 세상이 말도 안 되는 일투성이라서.” “그럼 도대체 어떡하자는 건데. 일어난 일을.” 나는 분명, 석이에게 그렇게 말했다. 어떡하자는 건데. 일어난 일을. 어쩌자고 그런 말을 해버렸던가. 나는 그때 석이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p.61
“기억나? 프놈펜 숙소에서 배가 침몰하는 광경을 생중계로 봐야 했던 그날. 나 자꾸 그날이 생각나. 이런 일들이 되풀이되는 건 정말이지, 말이 안 되잖아. 그때 나는 내가 이렇게 괴로운 게 내 연약한 마음의 문제라고만 생각했어. 근데 이번에 깨달은 거야. 이건 내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고.” p.64
어떤 기억을 집요하게 추적하다 보면, 그것이 정말 물성을 지닌 무엇처럼 느껴지게 된다. 생생하게 만져지는 감각, 흐르는 기류, 시시껄렁했던 나의 마음 같은 것들. 그러니까 기억을 추적하는 과정은 고통 그 자체이지만, 그 고통 너머에 존재하는 희미한 마음이 있다. 건너보는 마음, 살펴보는 마음, 그 기억을 안고 내일을 살기 위해 다짐하는 마음들. p.69
우리는 함께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참 세상일이라는 게 신기하다고, 전혀 신을 믿지 않을 것 같던 사람이 신을 믿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석이가 건조하게 대답했다. 믿지 않고는 살 수 없었다고. 죽은 사람이 좋은 곳에 간다고 믿어야만 산 사람이 살 수 있는 거라고. p.93
*키워드
#가늠과이해의차이 #기억하려는방식의차이 #상실을다루는법
*이런 사람에게 추천해요
예고 없이 닥친 큰 사회적 참사에 대한 부채감을 갖고 있는 사람
타인의 아픔이 내 아픔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궁금한 사람
상실의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
슬픔을 잊지 않으려는 사람
*한줄평
상실은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우리’를 넘어 ‘영원’에 진 빚을 갚아나가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