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조금만 더 행복하면 안될까요?"

크리스마스를 뒤로 하고 니스행 야간 버스에 오르다

by 완다

크리스마스는 나에게 가장 큰 축일인 만큼, 다음날까지 계속 여흥이 이어졌다.

라데팡스 지역 신시가지에는 신개선문이 있고, 거기에도 크리스마스마켓이 크게 열린다기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와보는 곳이었고, 마침 역사적, 문화적 배경으로 볼 때 그곳을 내 인생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기에도 충분해 보였다.

에투왈 개선문을 예술적, 역사적으로 재해석하여 계승한 신개선문 Grande Arche de la Défense. 그 앞 광장에 열린 크리스마스 마켓.
광장 저 멀리,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곳에 구 개선문이 보인다.


수많은 천막 안을 헤매는 사이, 나를 사로잡은 한 장소가 있었다.

파란 조명을 받은 하얀 나무 구조물, 그리고 그 주의를 삥 둘러싼 자그마한 크리스마스트리들이었다.

둥그런 이글루형 천막 정중앙에 솟은 흰 나무,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작은 트리들.


비치된 종이가 없었기 때문에, 방문객들로부터 각자의 주머니에서 차출된 종이들로 자연스레 트리가 꾸며지게 되었다.

전체의 조화를 깨지 않기 위해, 정성 들여 쓰고 튀지 않게 달아놓았다는 느낌이 강했다. 프랑스 답다. (3대 이념이라고는 하나, 역시 자유 << 박애 <<< 평등이라는 ㅎㅎ 자유로운 영혼인 내가 봤을 때)


필기체라서 나에게는 더 멋스럽게 보였던 것 같다.

읽어보면 가족과 연인, 친구, 본인의 건강과 안녕을 비는 기원, 문구들로 가득하다.

나도 뭔가를 달고 싶었는데, 종이도 없고... 마침 여기까지 타고 온 전철표가 손에 잡혔다.

여행 직전에 너무 많은 눈물을 쏟았기 때문에, 축일의 주인께 각오하고 기도하며 빌었다.


"이제부터 조금만 더 행복하면 안될까요?"


건강과 소망은 덤이다.

지하철 티켓에 써서 달아놓은 나의 오너먼트. 날짜 바로 밑에 쓴 이름은 앱으로 지웠다 :)
신시가지 쪽에서 경험할 수 있는 크리스마스의 여러가지 모습


파리에서 하루를 더 보내고, 이제 파리 베르시 역으로 간다.

버스를 타고 니스로 가기 위해.

마침 코 앞에 영화도서관(La Cinémathèque française)이 있었다.


이 포스터를 잘 기억해두시기 바란다.


우울증을 극복하는데 영화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새까맣게 타버리고 바짝 졸아버렸던 감각을, 일부 되살려주었다.


어느 늦은 밤, 우연히 TV를 켜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EBS 세계의 명화 시간에서 <졸업>을 다시 만났을 때였다. 시작한 지 한참이나 지나, 이미 내용은 막바지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게 흘러 흘러, 그 유명한 엔딩 장면이었다. 감독이 컷 하는 것을 잊는 바람에 명장면이 탄생했다는 일화가 있는.

연기와 실제의 경계에서 고민하고 혼란스러워하던 두 주인공의 표정.

내 얼굴이 거기에 고스란히 얹혀졌다.

그 뒤로 영화를 정말 많이 찾아봤던 것 같다.

영화의 탄생지이자 좋아하는 영화가 많은 프랑스.

진실로 좋아했고, 고마움에 대한 감사 표시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인증 사진을 남겼다.


영화도서관 La Cinémathèque française


이제는, 질려서 거의 안 본다. 아니 못 본다.

그만큼, 훌륭한 영화라면 충분히 볼만큼 보았다. 내 용량 안에서는.


그렇게 겨우 우울증이 나아지나 싶었는데, 폐쇄공포증-광장공포증-공황장애가 연쇄적으로 찾아왔다.

그것도 다름 아닌, 추후에 떠난 한 여행으로 인해 발생했다.


파리 베르시 역 Gare de Paris Bercy


2층 대합실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짙은 흑갈색 단발고수머리 청년이 망설이다가 곁에 털썩 앉았다. 한 손으로 코를 막은 채.

- 혹시 화장지 있어요?

- 네. 잠깐만요.


몬트리올에서 돌아와 프랑스어를 다시 말할 기회가 없어 늘 아쉬웠는데, 일상에서 서슴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다.


잠시 후 버스에 탑승했다. 저녁에 출발해 밤새 달려 목적지인 니스에는 다음날 아침 일찍 도착할 예정이었다. 12시간 정도나 걸리는 긴 여정이었지만, 가격도 싸고 무려 하루치 숙박비를 아낄 수 있는 훌륭한 선택이었다.

우리의 좌석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늦게 표를 구하는 바람에, 맨 뒷좌석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좌석 사이가 무척 좁은데 뒤로 젖혀지지조차 않아 무척 답답했다. 얼른 잠이라도 청하는 수밖에 없다. 다행히 아이는 여행 시작부터 줄곧 핸드폰을 맘 놓고 사용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보였다.


한밤 중 잠이 깼다. 다른 쪽에 통통한 알제리계 중년 남성이 앉아있었는데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파리에서 요리사로 일하는데, 매주 이렇게 버스를 타고 집으로 내려간다고 했다. 우리보다 두 정거장 앞에서 내릴 예정이란다. 부인과 아이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니, 자리가 더이상 좁게 느껴지지 않아 신기했다.

그러다 하나, 둘 승객들이 중간에 내리면서 결국 빈자리가 많이 생기자, 성격 좋은 알제리 요리사는 앞자리 빈 좌석으로 이동했다. 덕분에 나와 아이 역시, 뒷 좌석을 둘로 나누어 길게 누워 갈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다시 잠이 들었는데, 알제리 요리사가 나를 깨워주고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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