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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솦 솦 Apr 23. 2020

인종차별

지난 2월에 프랑스에 갈 때였다. 아직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하지 않은, 중국에서 시작한 그런 바이러스가 있다더라. 전염력이 빠르다더라.. 정도의 소문만 돌기 시작하고 아직 미국까지는 퍼지지 않은 그런 때였다.


친구들과 조금은 급작스럽게 결정한 일주일 간의 프랑스 여행을 가는 비행기 안에서 프랑스에 요즘 yellow peril이 심하다고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아시안을 경계하는 모든 행위를 포함하는 표현으로 yellow peril이라는 표현을 쓴다. 본래는 아시안이 백인들 위주의 문명을 압도할 것이라는 공포심에서 비롯된 말이라는데, 요새는 아시안을 향한 경멸이나 차별에도 같은 표현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상관없이 그저 피부색만으로 차별받는 것이 좋은 기분은 아니기에, 

아무래도 비행기에서부터 조금 긴장하고 주눅이 들었던 것도 같다. 특히나 오만하기로 소문한 프랑스인들이라면 더욱 그러할 거라는 어떤 편견도 작용했던 것 같다.



그러나 막상 간 프랑스에서 우리는 단 한 번을 제외하곤 어떤 차별도 경험하지 않았고, 심지어 매번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매우 친절한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거나, 친구를 만들거나, 좋은 대화를 나누는 경험을 했다. 참고로 누가 프랑스 사람들 영어 못한대. 파리가 아닌 시골이나 지방 사람들은 영어가 아무래도 부족했지만 파리에서는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것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이름 까먹은 친절한 저 친구


미국과 달리 레스토랑 웨이터가 좋은 서비스를 했다고 높은 팁을 받는 문화도 없다. 미국에서 표정과 대화가 돈으로 환산되는 서비스를 받다가 이렇게 대가 없이(?) 제공되는 친절한 서비스를 받으니 그것도 참 새로웠다. 다들 친절하고, 다들 상냥했다.



단 한번 불쾌했던 경험은 물랑 루주 공연장 앞에 있는 골목길에서 늦은 저녁을 먹으려 했던 금요일 밤이었다. 불금은 프랑스도 마찬가지여서 골목을 가득 채운 레스토랑들이 몽땅 사람들도 가득 차서 들어갈 수 있는 데가 없었다. 몇 블록을 걷고 걷다 간신히 찾은, 그마저도 테이블이 딱 하나 남아있는 작은 레스토랑에 들어가려고 하니 웨이터가 문 앞에서 손으로 우리를 제지하는 것이었다. 이유는 뭔가 있었다. 예약되어있는 자리라고 했던가-

예약되어있는 자리였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예약석이라는 표지가 없었기에 그 말이 다 믿기지도 않았다. 왠지 기분이 나빠진 우리는 그냥 숙소로 돌아와서 대강 사서 먹었던 것 같다.




'차별'이라는 단어는 차별당하는 주체가 되지 않고서야 단어가 내포하는 단어의 무서움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 차별은 꼭 행동으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닌 것도 같다. 하다못해 상대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서도 우리는 차별을 느낄 수 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중국발이라는 사실 때문에 전 세계의 중국 출신 사람들이 곤욕을 당한다고 들었다. 덩달아 비슷한 외모를 가진 아시안들도 곤경에 처할 때가 있다. 며칠 전 마침내 찾아온 봄기운에 너도나도 쿼런틴을 뚫고 산책을 하던 어느 오후, 한가롭게 산책을 하던 내 옆을 조깅하며 지나가던 백인 남자가 "Go back to China"를 던지곤 지나가버렸다. 


"What the...?"


알지 못하는 낯선 이에게 혐오의 말을 아무렇게나 던지는 그 영혼이 더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그것밖에 되지 않는 그 인격에 말을 섞어 봤자 득이 될 것이 없다는 것도 안다. 혐오와 차별, 배제와 두려움이 더욱 당연한 키워드가 되어가는 것 같은 이 이상한 시대에 저런 사람이 내 주위에 없으리란 법이 없는 것도 안다. 한국에서 여성으로 태어나서 지긋지긋하게 겪었던 여성차별이 싫어서 미국에서 공부하겠다고 결심을 했고, 미국에서는 인종차별을 겪어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차별은 내게 익숙한 단어이다.

차별에 막혀 넘어질 때마다 부서지기를 수십 번 반복했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기로, 부서지지 않고 그러안고 넘어가기를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아마 나의 나머지 인생은 이 연습의 반복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매번 화가 나는 것도 어쩔 수가 없다. 특히나 시카고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동네 중 하나인 이 지역에서 쿼런틴 기간 동안 한가롭게 조깅을 뛸 수 있는 백인 남자가, -단언컨대 전 세계에서, 인간의 문명이 시작된 이래로, 백인 남자만큼 항상 권력의 정점에 서 있던 존재는 또 없을 것이다- 지나가던 낯선 아시안에게 혐오의 말을 던진다는 것. 자신이 가진 세상이 자신의 권력이라 생각하는 그 얇고 싸구려 같은 특권의식에 화가 났다. 혐오의 말 한마디 따위 낯선 이에게 던져도 된다고 생각하는 그 끔찍한, 성숙하지 않은 인간의 정신에 분노했다.


한국의 인터넷 신문을 보면 난민이나 불법체류자들에 대한 신문기사에 하나같이 달린 혐오의 댓글을 보곤 한다. 가장 근래에 본 댓글은, 손흥민이라는 축구선수에게 눈을 찢는 인종차별적인 제스처를 취한 남미의 한 선수에 대한 기사에 달린 댓글이었다. "까만 녀석이", "못 사는 나라 출신 주제에" 등등 출신 국가와 피부색으로 차별에 차별로 답하는 댓글을 보며, 그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하며 그냥 기사를 껐던 기억이 난다.


피부색, 문화, 정치, 역사, 경제, 젠더-이 모든 것을 제외하고 남는 것은 역시 사람이다.

다른 피부색과 외모 안에 결국 모두 뜨거운 피를 가지고 따뜻한 숨결을 가진 사람이지 않은가.

타인이 내게 차별을 행했다고 같이 그렇게 낮아질 필요는 없지 않을까. 차라리 그러는 상대를 불쌍하게 보는 편이 낫겠다.(불쌍하게도 보지 않는 것이 더 낫겠지만 그렇게라도 '승리'는 해야겠다는 생각에)




프랑스에서 금요일 밤 그렇게 아주 작은 차별을 레스토랑에서 당하고 나서 왠지 마음이 가라앉았었다.

네가 뭔데 날 알지도 못하면서 피부색으로 차별하냐 싶기도 했다.

 

그렇게 그 다음날 아침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크다는 플리마켓에 가 보았다. 

18세기에 만들어진 장신구 (믿거나 말거나), 오래된 LP판, 중국에서 건너온 도자기 등등 

몇백 개는 되는 부스가 세워지고 그곳에 자신이 좋아하는 물건들을 사러 온 사람들이 북적였다. 


옛날 회중시계


그리고 거기서 참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작은 장신구를 파는 프랑스 아줌마와, 그곳에서 구경을 하던, 십 대에 프랑스로 이민 온 일본계 프랑스 아줌마- 센스가 좋은 아줌마 가게에서 우리는 빈티지한 반지와 액세서리를 사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낯을 좀 가리던 프랑스 아줌마는 금세 마음을 열고 이것저것 설명을 해주다 결국 깎아서 파시고 일본인 아줌마는 어떻게 일본에서 프랑스에 왔는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이야기 나누어주신다. 그러다 결국 사진까지 한 장 같이 찍고.


아줌마의 이름도 까먹고... 일본계 아줌마의 이름도 까먹고...




아줌마의 노천 마켓에서 산 빈티지 반지




차별보다는 인간애가 좋다. 잘 알지 못하는 낯선 이라고 해서, 피부색이 다르다고 해서, 다른 문화, 혹은 정치적 성향을 가졌다고 해서 혐오를 발할 필요가 있는가. 한 번이라도 따뜻이 함께 웃을 수 있다면 차별보다는 사랑이 더 낫지 않겠는가. 아니, 애초에 그 둘이 비교가 가능하기나 하겠는가. 

어디 비교도 되지 않는 것들 중에 더 급이 낮은, 어디에 써먹을 데도 없는 차별이라는 것을

다른 소중한 존재에게 써먹는가.

Do what you want for yourself to others. Love others as you love yourself.


차별에 대해 생각하다가,

차별을 이기는 것은 오직 사랑이라는 생각에,

그리고 사랑은 의외로 별 것 아니라는 생각에. 

그저 한번 같이 웃으면 그것만으로도 사랑은 완성되기에.


Do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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