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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솦 솦 Jun 16. 2020

눈물 섞인 청국장

눈물을 먹은 건지 청국장을 먹은 건지, 혹은 사랑을 먹은 건지.

"다 왔습니다. 5,800원입니다."

"감사합니다."


카드로 택시비를 내고 오래된 낡은 아파트 앞에서 내렸다. 하루가 더우려는지 오전 일곱 시인데도 벌써 피부에 내리쬐는 햇살이 뜨겁게 느껴지는, 6월 초의 평범한 아침이다. 가방을 다시 한번 단단하게 그러쥐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한층만 올라가면 되는데도 마음이 조급하다. 바로 눈 앞에 있다. 이제 다 왔다.


탁탁 탁탁.... 무거운 가방을 손에 든 채 계단을 바쁘게 뛰어 올라갔다. 문 앞에 도착했다. 짐을 내려놓고 벨을 누르기 전 심호흡을 한다. 후- 이제 정말 다 왔다.


벨을 누르니 안에서 부산한 움직임이 들려온다. 방 맨 끝에서 다른 끝까지 걸어도 몇 걸음이면 이내 도달할 그 작은 아파트에서 문이 열리기까지 어쩜 그렇게 오래 걸리는지 기다리는 새에 숨이 턱 막힌다. '빨리빨리빨리...'라고 열세 번쯤 속으로 생각했을 때쯤 덜컥, 하고 열리는 현관문. 짐을 한쪽으로 밀며 문을 마저 여니 동생이 마치 어제 본 것 같은 익숙한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달려 나온다. 아마 지난 일 년간 큰언니가 죽었으리라 생각했을 우리 집 막내, 강아지 땡이도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둥그렇게 뜨고 달려 나온다. 죽은 언니가 살아 돌아왔다!


"언니 왔어-"하며 여행 가방부터 밀어 넣고 집으로 들어선다. 일 년 만에 다시 돌아온 내 집, 우리 작은 아파트. 일 년 만에 보는, 눈만 떴다 하면 서로 죽일 듯이 싸워댔던, 그러나 지난 한 해 동안은 꿈에서도 그리웠던 연년생 동생과 지난 일 년 킁-하는 콧소리마저 환청처럼 들렸던 코가 짧은 우리 집 강아지가 마치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바다에서 살아온 것처럼 춤을 추며 나를 환영한다. 정말 돌아왔구나. 우리 집이다. 춤을 추는 저 사람은 내 동생이고, 그 사람 곁에서 함께 뛰고 있는 강아지는 내 강아지다.


집 안에 들어서니 아침밥 냄새가 온몸을 감싼다. 밥통이 마침 김을 뿜어내느라 칙칙폭폭 소리를 내며 바쁘게 운전 중이다. 칙칙폭폭 올라오는 김에 집안 가득 밥 냄새가 퍼진다. 마치 코만 아니라 내 온몸이 밥 냄새를 흡입하는 것 같았다. 온몸으로 킁킁거리며 밥 냄새를 빨아들인다. 고슬 거리면서도 윤기를 머금어 촉촉한 밥이 뿌옇게 보송보송 올라오는 김을 공기 중에 흩뿌리며 농염하게 익은 자신을 어필한다. 와, 공기도 맛있을 수가 있구나. 후욱-하며 나도 모르게 밥 냄새를 들이켠다. 고슬고슬하고 촉촉한, 새로 갓 지은 밥 냄새다.


살갑지 않기로는 전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우리 엄마가 부엌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다. 매일 입고 있던 얇은 소매 없는 '냉장고' 원피스 차림이다. 많이 보던, 많이 입어서 엉덩이 부분 색이 조금은 바랜 저 익숙한 원피스, 많이 보던 저 뒷모습. 진짜 우리 엄마다.

일 년 만에 이역만리 먼 곳에서 딸이 돌아왔는데 눈길을 주는 둥 마는 둥하고 부엌에서 떠나질 않는다. 와서 짐도 받아주고 안아주고 눈을 맞추고 한번 웃어줄 법도 한데 우리 엄마는 눈길도 안 준다. 와, 내가 안 반가운가?

'더 보고 싶었던 사람이 더 보고 싶었던 척해야지 뭐, '하며 짐을 내려놓고, 환영의 춤을 아직도 추고 있는 강아지와 동생을 뒤로한 채, 엄마 등에 매달려본다.


"엄마 나 왔어-."

"응, 밥 먹자."

"우리 뭐 먹어?"


대답도 생략한 우리 엄마. 엄마 어깨너머로 살펴보니 보글보글 끓는 물에 다시마와 멸치를 넣어 육수를 우려내고 있다. 보글보글 올라오는 공기 방울에 멸치와 다시마가 어지럽게 엉켰다가 풀어지며 고소한 밥 냄새 사이로 달콤한 육수 맛을 살짝 더한다. 암, 육수가 들어가야 깊은 국물 맛이 제대로 나오지.

도마 위를 슬쩍 보니 두부가 가지런한 직사각형 모양으로 열을 맞춰 누워있다. 두부랑 함께 어젯밤 사 왔을 싱싱한 애호박도 수줍은 반달 모양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 옆에는 팽이버섯이랑 색깔이 고와 마치 형광물질을 탄 것만 같은, 발갛게 상기된 붉은 고추가 옹기종이 모여있다.


"청국장 먹자."


'아, 청국장.....'


나도 모르게 속으로 실망한다. 단언하건대 평생 한 번도 청국장을 좋아해 본 적이 없다. 발효음식은 몽땅 잘 먹는 토종 한국인이지만 청국장은 레벨부터가 남다르다. 특유의 냄새부터 자신은 평범한 발효음식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임을 당당히 어필하는, 진입장벽이 높은 음식이지 않은가. 해외에서 창문을 연 채 끓여먹었다가 시체 썩는 냄새가 난다고 경찰에 신고가 들어갔다는 무시무시한 도시전설이 떠도는 난이도 최상급 음식이다.



청국장 <출처: pixabay.com>



더구나 엄마에게 한 번도 직접 말한 적은 없지만 엄마는 요리가 젬병이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엄마지만 평생 전업주부이셨음에도 요리 솜씨는 늘지가 않으신다. 고등학교까지 호리호리했던 내가 대학교를 입학하고 학교 앞 분식집을 소개받은 이후부터 급속하게 살이 찌기 시작했다. 밥이란 맛있는 거구나...!라는 놀라운 사실을 스무 살이 되어서야 분식집 이모님으로부터 배웠다. 지금까지도 요리에 전혀 도전하지 않는 나 자신이 엄마와 가장 많이 닮은 자식이라는 사실로 미루어보건대, 사실 엄마는 가족들의 끼니를 위해 요리를 했을 뿐 요리를 즐기는 사람이 전혀 아니었던 것 같다. 애정이 없다 보니 그토록 오랜 시간 우릴 위해 음식을 했음에도 실력은 오늘 처음 숟가락을 잡아본 사람 같았던 것이다.


여하튼 요리에 대한 애정도 실력도 전혀 없는 엄마가 끓이는 청국장은 본래의 난이도와 결합해 삼십 평생 먹어본 음식 중 가장 먹기 힘든 레벨의 고역을 달성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일 년만에 이역만리 유학길에서 돌아온 딸의 아침밥상에 청국장이라니.... 아 우리 엄마 나 사랑하는 거 맞나...





내 인생 이대로는 안될 것 같아서 스물여덟에 토플을 공부해 스물아홉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토플만 간신히 공부하고 영어 회화 따위는 미처 준비하지도 못한 채 '에라 모르겠다. 닥치면 어떻게든 되겠지'하는 막무가내 정신으로 무장하고 떠난 유학이었다. 귀머거리로, 벙어리로, 혹은 장님으로, 첫 해를 보냈다. 학교가 끝나면 학교가 맞닿아 있는 아름다운 미시간 호숫가에 앉아서 펑펑 우는 것이 일과였다. 학교 사람들이 농담처럼 내 눈물 때문에 미시간 호수 수위가 1인치 올라갔다는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그렇게 울어댔다.

 

음식도 하나도 맞지 않았다. 피자랑 햄버거가 맛없는 음식인 줄 미국 본토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너무 짜고, 너무 크고, 너무 건조했다. 가난한 유학생에게 잘 차려진 한국식 상차림은 비싸디 비싼 사치였다. 쌀을 사도 반찬을 만들어 먹을 재주가 없었고, 반찬이 있어도 밥을 차려먹을 시간도, 돈도 없었다. 내 주먹도 들어가지 않은 가장 작은 통에 담긴 김치로 한 달을 버티곤 했다.


모든 것이 힘든 때였다. 내 인생을 구해보려고 떠나온 유학길이었지만 구원은커녕 반병신같이 사는 나 자신이 너무 한심했고, 이렇게 살려고 아픈 엄마를 버려두고 왔나, 싶은 죄책감도 옥죄어왔다. 엄마는 유방암 4기를 선고받고 5년째 투병 중이었다. 처음 유학을 떠나던 날 공항으로 날 배웅하던 엄마는 울지 않았고, 감상적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얼굴은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눈은 울고 있었던 것 같다. 붉어진 눈가와 웃지 않는 입꼬리가 속으로 울고 있는 엄마를 내비쳤다. 울지 않은 이유는, 가지 말라고 바짓가랑이를 붙잡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어쩌면 다신 못 볼 지도 모르는 딸에게 마음의 짐을 주고 싶지 않아서였으리라. 아마도 그 빨개진 그 눈으로 속으로는 앞으로 잘 지내라고 영원한 안녕을 당부하고 계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일 년을 고생한 후, 미치기 전에 엄마가 보고 싶었다. 없는 돈을 박박 긁어모아 한국행 비행기표를 샀다. 학기가 끝나자마자 그다음 날로 한국으로 날아왔다. 어쩜 다신 못 볼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딸이 일 년 후 열네 시간 동안의 비행기 여행을 마치고 공항에서 바로 집으로 돌아온 그 아침, 우리 엄마는 청국장을 끓였다.





이내 엄마는 갖은 야채와 청국장을 육수가 끓고 있는 뚝배기에 넣었고, 뚝배기가 뿜어내는 수증기에 집안은 곧 청국장 냄새로 가득 찬다. 미국으로 유학을 가기 전 5년 동안 참 지겹게도 청국장을 먹었다. 발효콩에 항암효과가 있다는 말에 아침저녁으로 청국장을 드신 탓이다. 밥솥이 내뱉은 고소한 밥 냄새에 진한 청국장 냄새가 섞이니 그제야 정말로, '와, 나 집에 왔다' 한번 더 실감을 한다. 지난 5년간 수시로 맡았던 그 냄새 아닌가. 집의 냄새다. 엄마의 냄새다.


촌스러운 우리 가족은 식탁을 두고 굳이 상을 차려 밥을 먹곤 했다. 작은 상을 꺼내 갓 지은 밥을 퍼 올리고, 반찬들을 낸 다음, 가스레인지에서 바로 내린 청국장을 놓는다. "아침 먹자." 엄마의 한 마디에 동생과 나는 마치 어제도 그렇게 밥을 먹었다는 듯이 각자의 자리에 앉아 태연히 수저를 든다.


갓 지어진 밥은 밥알이 알알이 세어지듯 씹힌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다. 씹어 목구멍으로 넘길 때의 식감은 또 어떤가. 촉촉하기가 웬만한 카스텔라는 비교도 안 될 수준이다. 14시간 비행으로 피곤했던 내 몸은 내 도착 시간에 맞춰 맛있게 지어진 달콤한 밥의 식감에 녹아내린다. 갓 지은 밥이 주는 따뜻한 위로가 피곤함을 솜사탕이 녹듯 녹아내리게 한다.


오른쪽에는 엄마가, 왼쪽에는 동생이, 엄마 옆에는 땡이가 앉아서 아침밥을 먹는 이 풍경. 지난 일 년 동안 꿈에서도 보았던 그 장면이다. 청초하게 보일 만큼 포슬 한 밥에 벽돌 색을 닮은 자작한 국물의 청국장을 비벼 한술 떠먹는데, 참 이상하다. 우리 엄마표 청국장이 생각보다 맛있다. 청국장이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었나...? 아니, 우리 엄마가 음식을 잘했었나...? 짜지도 싱겁지도 않은 자작한 청국장 국물에 담긴 두부가 이렇게나 맛있는 존재였던가. 호박은 또 어떻고. 마치 아주 알맞게 선탠을 하고 나온 피부를 자랑하는 젊은이처럼 간이 알맞게 배여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 매운 빨간 고추는 마치 나 없으면 이 게임은 완성되지 않는다는 듯이 청국장의 끝 맛에 완벽한 짜릿함을 더한다. 마치 러닝타임 종료 5초 전 완벽한 타이밍에 승리로 이끄는 골을 꽂아 넣는 공격수 같다. 이야.... 우리 엄마 표 청국장이 이랬었나.


'뭐지 이 완벽한 느낌은..?'


아, 먹다 보니 이제야 알겠다. 나는 지금 추억을 먹고 있다. 아니, 나는 지금 아픈 몸을 일으켜 여행에 지쳤을, 타지 생활에 외로웠을 딸에게 주는 엄마의 사랑을 먹고 있다. 어쩌면 다시는 살아서 못 볼 지도 몰랐을 그 딸에게 어쩌면 다시는 못해 먹였을지도 모를 아침밥을 지어 먹이는 엄마의 마음을 먹고 있다. 코 끝이 찡해져 왔다.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눈물을 먹었던 것 같다. 구수한 국물에 갓 지은 밥과 함께 꾸역꾸역 눈물을 말아서 청국장을 먹었다. 밥 한 알 한 알, 청국장에 들어간 작은 콩알 하나까지도 눈물에 담아서 먹었다.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아직도 그 아침 밥상의 맛을, 공기로 퍼져나가던 냄새를,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났던 아침 햇살을 기억한다. 특별할 것도 없는 청국장을 끓여낸 엄마의 뒷모습을 기억한다. 동생과 강아지가 환한 해처럼 기뻐하며 즐거워하던 그 얼굴을 기억한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누군가에게는 평범할, 내가 가장 사랑해 마지않는 찬란한 아침 식사. 작은 상에 둘러앉은 아픈 엄마와 철없는 두 딸, 그리고 똑같이 철없는 강아지까지. 내가 그리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그 해 짧은 한국에서의 두 주 간의 일정을 마치고 나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짧은 두 주 동안 뭐가 그렇게 바빴는지 나는 엄마와 자주 밥을 먹지 못했고, 엄마는 내심 서운해하셨다. 그리고 그다음 해 가을 학기가 시작하기 직전 엄마는 길지 않은 오십 이년 간의 지구 여행을 마치고 영원한 안식으로 돌아갔다. 암이 온몸으로 전이된 엄마가 폐렴 합병증까지 와서 임종을 준비해야 한다는 의사에 말에 부랴부랴 시카고를 떠나 알래스카를 넘어 북쪽 바다 어딘가를 날고 있던 즈음이었다.


아마도 한국에서의 짧은 두 주 동안 몇 번은 더 엄마와 식사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아침 밥상, 청국장과 고슬고슬한 갓 지어낸 밥이 그려내는 순간이 내가 기억하는 엄마와의 마지막 식사이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지난 십 년간 청국장을 몇 번 먹어보지 못했다. 여전히 내가 음식을 안 해 먹는 탓일 테고, 엄마가 걱정하듯 그렇게 내 건강을 걱정해주는 사람이 없는 탓일 테다.


작년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갔다. 미국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그대로 직장을 잡아 눌러앉은 나는  오랜만에 "한국음식을 먹으러" 한국을 방문했다. 실로 모든 것이 맛있었다. 배달시켜 먹은 자장면은 황홀경에 빠질 만큼 환상적인 맛을 선보였고, 전철역  포장마차 이모님으로부터  떡볶이와 순대는 ‘ 원짜리  장에 이렇게 귀한 맛을 선보이실 수가 있다니...!’하며 이모님께 절을 올리고 싶어 질 정도의 천하진미였다. 친척들이 맛집이라며 데려간 수원 왕갈비는 너무 아까워서 갈빗대를 가방에 넣어 미국으로 가지고 오고 싶었다. 생각날 때마다 꺼내어 빨아라도 봐야지 하는 생각에.


 

순대 <출처:flickr.com>


참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 모든 음식에서 엄마를 만난다. '모국의 음식'은 '어머니'와 등가 되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음식점과 포장마차에서 만난 이모님들은 참 우리 엄마 같으셨다. 뒤에서 안은 우리 엄마 등처럼 따뜻하고, 적당히 친절하고, 적당히 잔소리도 하는, 딱 알맞은 사람의 온기를 지닌 이들이었다. 그들의 손을 통해 만난 우리 엄마의 맛-


'한식'은 내게 그런 존재이다. 내가 지금 속한 세상에는 너무 진귀해 쉽게 찾을 수 없는 그것. 그러나 어머니의 땅, 모국에 돌아가면 귀퉁이마다 이모님들의 손을 빌어 흔하게 만나볼 수 있는 그것. 비가 추적추적 오는 2월 저녁 전철역 출구 모퉁이에 서 있는 포장마차에서 종이컵에 어묵 국물을 담아 한 입 먹는 떡볶이와 순대가 왜인지 엄마가 내어주는 청국장 같은 것. 전화를 걸어 시키면 (요즘에는 배달앱이 있어서 전화를 걸 필요도 없다고 한다. 미국에 있다 보니 소식으로만 아는 이야기이다) 30분도 안돼 도착하는 짜장면의 구수한 맛이 어릴 적 엄마는 왜인지 짜장면이 싫다고 하며 우리만 사주셨던 그 짜장면을 기억나게 해주는 그런 것. 기름기가 색기 있게 흐르는 맛있는 왕갈비는 한 달 식비를 아끼고 아껴 온 가족 외식으로 먹었던 어릴 적 돼지갈비를 생각나게 해 주는, 그런 것.  가끔 전철역 모퉁이 3천 원짜리 떡볶이가 그리워서 150만 원을 결제하고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날아가고 싶게 만드는 그런 것-


거창하지 않아도 좋다. 비싸지 않으면 정겨워서 더 좋다. 장인이 만들지 않은, 여염집 아낙의 손길에서 나온 몇천 원짜리 음식은 음식에 재능이 없던 엄마를 생각나게 해 주어서 더 아름답다. 내게 한식이란, 그렇게 아름다운 길거리의, 아주 평범한, 너무 흔해 이름 붙이는 것이 더욱 쑥스러운, 그런 음식들이다.


나는 아직도 청국장이 싫다. 그렇지만, 아마도 언젠가 누군가가 청국장을 끓여주면, 아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구나-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 사랑을 반가이 받아들일 것이다. 엄마의 사랑이 담긴, 그것. 그것이 한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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