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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솦 솦 May 26. 2020

오월의 밤

교회 언니의 기도 이야기


늦봄의 밤이 청량하다.



한국보다 위도가 높은 시카고는 겨울이 길다. 대강 위도를 살펴보니 북한의 중강진, 두만강이 있는 그즈음과 비슷한 위도인 것 같다. 그러니 4월에도 폭설이 내리는 건 예사이다. 그러나 지난 주말, 그렇게도 지지부진하게 발을 담그고선 떠나지 않던 겨울이 마침내 그 기세를 꺾고 물러났다.


겨울과 엎치락뒤치락하던 봄은 그 레슬링에 기운이 다 빠졌는지 채 활짝 개화하지도 못한 채 머리를 숙이고 겨울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겨울과 봄을 번갈아 만나는 것 같던 몇 주가 이어지더니 봄은 기운 없이 어느새 여름에게 쉽게 자리를 내주고 아지랑이처럼 덧없이 증발해버린 것이다. 오늘 시카고의 온도는 화씨 80도 중반까지 치솟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롱 패딩 코트를 입은 사람들이 간혹 보였는데 오늘은 너나 할 것 없이 짧은 하의에 마찬가지로 짧은 상의를 입었다. 상의는 입지 않은 사람도 왕왕 있다. 겨울이 긴 만큼 눈부신 여름에 마치 굶주린 사람처럼 시카고 사람들은 여름을 게걸스럽게 섭취할 준비를 한다. 마치 ‘여름 너 시작만 해봐라. 내가 아주 남김없이 즐겨줄 테다’하듯 말이다. 시카고의 여름 공기는 뭔가 광적이다.


하루의 열기를 아직 머금은 밤공기를 시원한 바람이 가른다. 열어놓은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아직 한낮의 더위가 담긴 훅한 더운 기운 사이로 라일락 향기를 담은 꽃향기와 함께 스며드는 시원한 바람이 상쾌하다. 조용한 밤에 불을 끄고 거실에 앉아 창 밖을 내다보는데, 고층건물들 사이로 밝은 달이 슬쩍 보인다. 마치 시원한 공기가 물기를 머금은 붓으로 그린 듯 고층 빌딩 사이로 눈에 보이듯이 채색된다. 아름답고 정명한 밤.


이 청량한 공기, 저 익숙한 달. 


뭔가 모를 기시감에 ‘뭐지, 이 반가운 감정은...?’ 하며 곰곰이 생각해보니, 언제 적인지도 모를, 아주 새카맣게 까먹었던 이십여 년 전 밤으로 달려간다. 아마도 이맘때일,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는 학교에서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기도를 하곤 했다. 버스에서 내려 아파트 단지를 통과해 집에 올라가는 그 짧은 시간, 그 하루가 어땠는지를 하나님께 알려드리곤 했다. 오늘은 그 친구가 뭐 어땠고, 오늘 수업은 지루했으며(이 부분은 항상 같았던 듯), 거기는 어떠시냐고 안부도 묻고 (천국에서 어떻게 지내시는지 내심 궁금했던 것도 같다). 열일곱의 마음은 그 대화가 참 즐거웠다.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하든 상대가 온 마음을 다해 즐겨들을 것이라는 확신이 가득한 대화는 어떤 이야기를 하든 간에 즐겁기 마련이다.

 

그 밤이 꼭 오늘 밤만 같았다. 라일락 향기가 흐드러지고, 아니, 아카시아 향기였던가. 봄날의 따뜻한 공기는 너무 진해 무겁기까지 한 라일락 향기와 어우러져 감당이 안될 정도로 아름다웠다. 숨쉬기 위해 코로 들어오는 공기마저 소비하는 것이 아까울 만큼 달콤하다. 밤공기가 두둥실 마음을 떠오르게 하는, 아니 실제로 좀 떠올랐던가, 발걸음이 솜사탕 같은, 그런 밤이었다.


사진출처:pixabay.com


종알종알 종알종알....

 

그때나 지금이나 말수가 많은 편이 아닌 나는 유독 하나님께 이야기를 전할 때에는 이야기가 술술 흘러나왔다.

상대에 대한 신뢰가 어느 대화에서나 가장 중요한 법인가 보다.


아파트 상가를 통과해서 우리 집이 있던 105동까지 걸어가며 아파트 사이로 보이는 그 밤하늘이  오늘 밤의 밤하늘과 참 닮았다. 낮의 더위가 덥혀둔 따뜻한 밤공기에 숨 쉴 공간을 틔어주는 시원한 바람이 부는 그 밤.

반가운 마음이 든다. 마치 오랫동안 잊고 있던 귀한 선물상자를 찾은 듯이 기쁘다.

아 내가 그랬더랬지. 어떤 이야기든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분이 계셔서 참 행복했더랬지.




열일곱의 나와 어느새 마흔이 넘은 나는 같은 사람인데 참 다른 사람 같구나, 

문득 생각한다.



언제부터인가 나의 즐거운 종알거림은 잦아들었고, 눈살을 찌푸린 심각한 침묵이, 무거운 단어들이, 혹은 좌절이나 절망을 토해내는, 그도 아니면 오히려 분노에 가까운 외침이 그 자리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그 마저도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부터는 그 색채가 많이 바뀌었다. 왜 그랬을까, 가만 생각해보니,

어떤 좌절이 그곳 어딘가로부터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 같다. 세상이 마냥 행복할 수만은 없었고, 세월은 마냥 오월의 밤공기 같지 만은 않았으며, 그토록 좋아했던 그분께 그렇게 열심히 기도해도 엄마가 암으로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은 내 철없던 행복한 세상에 작은 균열을 내었다. 그리고 그 균열은 조금씩, 들리지는 않지만 나만은 들을 수 있을 만큼의 크기로 자작, 자 자작하는 파열음을 내며 깊어지고, 길어졌던 것 같다.


내 여정에, 그리고 내 실망과 좌절에 아직 답은 없다. 온종일 기도해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야속하게도 세상을 떠나고, 꿈꾼 것과 다른 세상을 우리는 선택지 없이 살아나가야만 한다. 이 모든 삶으로부터의 생채기들을 안고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여전히 키워가고, 깊어가게 해야 한다. 때로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이 모든 상처를 하나님 탓으로 돌리며 ‘들어지지 않은 기도’를 오로지 상처처럼 짊어지고 가기도 한다.



Pixabay.com


언제부터인가 기도로 채우지 않은 빈 공간이 많아졌던 것 같다. 말로 채운 기도의 허망함에 나는 침묵으로 기도하는 법을 찾기 시작했고, 침묵으로, 내 말을 채우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로 채우는 기도는, 내가 그분께 드리는 대화와 더불어 함께 하는 것임에도 나는 침묵으로만 하나님의 임재를 찾기 시작했다. 아마도 지난 시간 동안 수없이 아름다운 밤들을 지났지만 나는 그 공간을 그 분과의 대화로 항상 채우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마 남자 친구가 있었거나 친구가 있어 그들과의 대화로 채웠을 수도 있다. 친구와의 시간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내가 내 이야기 듣기를 좋아하는 분에게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은 시간들이 더 많아졌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기도하지 않았던가..?


그렇지 않다. 나는 항상 기도했다. 다만 설레는 마음에 홍조를 띠며 하루를 쏟아놓듯 기도하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나이가 들어서, 경험이 쌓여서, 생각이 달라져서... 이 모든 것이 아마도 조금씩 보태어져서 나는 열일곱의 철없이 기쁜 기도를 하지 않게 된 것도 같다. 


그런데 오늘 밤은 그때의 설레는 기도가 살짝 그립다. 아마도 이것은 오월의 밤공기가 주는 마법 이리라.

솜사탕 같은 공기의 폭신폭신함이 주는, 떨어져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몽글함이 주는 이완제와 같은 효과 이리라.





삶은 여정이다. 


나는 이 말이 참 좋다. 삶은 여정이기에 우리는 여전히 배울 수 있고, 실수할 수도 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는 실수를 하는 자신에 대해 (더) 인색해지는 나를 발견한다.(한번도 너그러웠던 적이 없었다. 그저 '더' 인색해져간다.) 이만큼이나 나이를 먹고선(!) 어쩜 그렇게 어리석냐? 하고 탓하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여정의 길 위에 있는 여전한 여행자이다. 여전히 실패할 여지가 있고, 또 실패해도 되는, 아직도 배우는 사람이다. 나는 도착지점에, 완전히 마무리된 길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열심히 달리는 러너이다. 

 

그러니 하나님과의 관계도, 아직도 마음 깊은 한편에 서운한 마음이 남아있는 지금의 이 상태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지금의 상태는 결과가 아니라, 열일곱의 내가 지금의 나와 다르듯이, 십 년 후의, 이십 년 후의 나는 또 지금과 다를 것이다. 나는 여전히 달라지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가능하면 조금씩 더 나아지고 있기를 바란다. 좀 더 나아지려면, 나도 좀 더 건강하게 생각하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넉넉해지려고 노력해야겠지.


오랜만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이마를 댄 채 중얼거리며 기도를 해보았다. 하늘이 보이는 거실 유리창 앞에 엎드린 채 기도를 드려본다. 


"사실 제가 좀 서운했어요..." 





서운한 줄 다 아실 분.

서운하다고 지난 세월 동안 골백번도 더 이야기했지만, 

아직도 분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서 나오는 그 단어의 무게를 이해하실 분.

그리고 아마도 이 세상 마지막 그 날까지 난 답을 모르겠지.

언제는 답을 알고 기도했나,

답을 모르니 기도하지.

분한 이 마음이 점점 사그라들고 

이렇게 곪은 채 가시지 않는 마음의 상처들도 아물 수 있기를.

답을 알지 못한 채 사는 삶이라지만

마치 답 같은 건 필요 없다는 듯이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기를.

그런 지혜를 배우기를.


오늘도 소곤소곤, 그렇게 기도를 건넨다.

언젠가는 이 소곤소곤 기도 만으로도 행복한 날이 오기를. 좀 더 크기를.


-f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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