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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솦 솦 Jan 05. 2024

너무 친절한 나란 사람

"언니는 너무 친절해요!"


그래, 나는 너무 친절하다. 친절하고 따뜻하게 보이는 사람이다. 언젠가 한동안은 한껏 경직된 얼굴로 웃음기를 거두고 사람들에게 냉정하게 굴어본 적도 있었다. 친절한 금자 씨...(아주 오래전 영화)에서 금자 씨가 왜 그렇게 무섭게 화장을 했냐고 묻는 누군가의 말에 "너무 친절해 보일까 봐"라고 대답했듯이, 너무 친절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세상을 향해 갑옷을 두르듯 금자 씨는 귀신같은 눈화장을 했고 나는 웃음기를 거두었다. 

웃음기 없는 기간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사람들은 차갑다고 뒷말을 했고, 차가운 것이 나도 너무 피곤했다. 


이미지 출처:노컷뉴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여성에게 '친절함'은 마치 당연히 가져야 할 덕목처럼 보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여성성'의 한 단면처럼, 마치 체크리스트에 상위에 랭크되어야 하는 그런 중요한 덕목처럼, 한국여성은, 아니 적어도 나는, 어릴 때부터 친절하도록 교육받았다. 그것이 당연한 시대에 태어난 탓이겠지. 그렇게 가르친 어머니를 탓하고 싶지만, 그녀도 그렇게 살았어야 했으므로 우리는 어쩌면 동지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오신 분들의 고인에 대한 찬사는 한결같이 "법 없이도 살 사람, " "천사 같은 사람"이었다. 남을 돕고, 사랑하고 베푸는 사람. 그것이 어머니 자신에게도 적용이 되었을지, 나는 자신이 없다. 어머니는 타인에게 호인이었을 때, 자신에게도 자비로운 사람일 수 있었을까. '착한 사람'의 외형(facade)을 유지하는 동안, 내면의 어머니는 행복했을까. 


교회를 다니는 사람으로서, 교회도 희생정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첫째, 예수가 '죽어서' (목숨까지 내놓고) 타인을 사랑했고, 둘째 그러므로 우리도 그러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아... 메시아가 날 위해 죽었는데 내가 못 죽으면 말이 안 되는 문화랄까. 아마도 이 가르침을 그렇게 마음깊이 받아들이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은 듯하다. 그 예수를 믿으면서도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분들을 그간 너무 많이 봐왔다.


남에게 자비로운 사람일 때, 베푸는 사람일 때, 그것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희생을 수반한다. 길에서 만나는 노숙자에게 얼마 간의 돈을 쥐어줄 때도 그 뜻은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금전적 혜택을 포기하고 그에게 살아갈 수단을 건네는 것이니까. 문제는, 얼마만큼의 희생이 옳으냐는 것이다. 

우리 어머니로부터 희생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은 배웠지만, 얼마만큼의 희생이 아름다운지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다. 예수는 죽기까지 하셨는데 너는 못 죽냐는 논리로 나오면 반박하기도 쉽지 않다.


그렇다 보니... 성인이 된 후 나는 줄곧 바운더리, 타인과 나의 경계를 긋는 일이 쉽지 않았다. 애타심이 너무 큰 나머지 나의 희생이 당연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내 어머니 같은 '호인'이 되어버린 거지.

이 문제는 내게 여러 심각한 다른 정체성 문제를 야기했다. '나'라는 정확한 경계가 없는 존재는 그 희미한 경계로 인해 내가 누구인지를 찾는 것이 쉽지 않다. 내가 그랬고, 아직도 그렇다. 지금의 내가 걷는 여정은 '나'를 찾아가는 지난한, 평생이 걸릴 여정일 것 같다. 


나의 희생이 너무도 당연한 나는 당연하게도, '나 자신'에게 가장 큰 적이다. 타인의 안위를 위해, -심지어 그 타인이 나의 호의를 나쁘게 사용할 나쁜 놈임에도- 내면의 기제가 자연스럽게 희생을 향해 움직이기 때문이다. '희생'이라는 단어는 숭고하고 아름다운 단어이지만, 무조건적으로 사용하지는 말아야 할, 더욱이 아이들에게 가르칠 때는 더욱 신중하게 가르쳐야 하는 그런 것이다.


최근의 나는 또다시 거대한 나 자신의 희생을 아무렇지도 않고 치렀는데, (그리고 상담받을 때 혼이 났지)

내 월급을 희생해서 다른 스태프들의 월급을 올려주는 일을 저질렀다. 

물론 너무 숭고하다. 다들 깜짝 놀랐다. 그러나 동시에 대체 뭐 하는 짓이냐 싶었다. 나로 인해 월급이 오른 스탭은 가장 막내 두 스탭인데, 특히 그중 하나는 내가 수퍼바이징 하는 존재이고, 정말 빈약한 월급을 받는다. 게다가 어머니를 모신다. 이런 조건들을 수렴한 나의 무의식은 자연스럽게 내가 받을 월급의 인상분을 포기하고, 그에게 주겠다고 발 벗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이 무의식의 발현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그녀의 월급이 나의 희생에서 나올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조직에 필요한 존재이므로 조직이 그 필요분을 만들어 냈어야 했다. 조직과 조직의 우두머리가 나태하게 버려준 조각을 내가 구태여 나의 희생을 곁들여 완성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아 이 우둔한 희생정신이여.


머리를 쥐어뜯으며 이 못난 버릇이 다시 나온 것을 후회한다. 물론 그녀는 매우 행복하다. 그래서 나도 물론 행복하다. 심지어 그녀는 그 인상분이 나로부터 나온 지 알지도 못한다. 이야.... 여기까지만 들으면 성인이 나셨다고 생각할 판이다. 

삶의 레슨을 크게 배웠다고 생각하고, 마음에 깊이 담아서, 다음번에는 조금 더 시간을 들여 어떤 기제가 내 무의식에서 작용하는지를 찬찬히 살펴야겠다.


'너무 친절한 사람'은 자신에게 잔인한 사람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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