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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솦 솦 Jan 07. 2024

오펜하이머

미연합감리교 공보부 8월에 실린 글입니다

공포는 공포를 낳고…


영화<오펜하이머>로 글을 쓸 수 있겠느냐는 편집장님의 말씀에 난감했습니다. 영화를 본 후 제일 처음 한 생각이 ‘이 영화로는 절대 글은 쓰지 말아야겠다.’였거든요. 2차 세계대전, 한국과 일본의 역학관계, 매카시즘과 공산주의, 핵과 전쟁 등,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은 주제들로 가득한 영화였기 때문입니다.


크리스토머 놀란 감독의 작품인 <오펜하이머>는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평전인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영화화한 것입니다.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이유로 제우스로부터 평생 독수리에게 심장을 뜯어먹히는 형벌을 당한 프로메테우스에 핵무기를 개발한 오펜하이머를 빗댄 것입니다. 적절한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이 발명한 핵무기의 파괴력을 실감한 후,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라고 말하며 평생 반핵운동을 했던 그의 심장은 아마도 매일 독수리에게 뜯기듯 고통스러웠을 것 같습니다.

 

영화는 역사를 알지 않고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핵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원료와 연구소가 있는 모든 나라(벨기에, 오스트리아, 노르웨이 등)를 지배하게 됨에 따라 연합군과 미국은 독일이 늦어도 1943년쯤에는 원자폭탄을 개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됩니다. 박해를 피해 독일을 떠나 미국에서 망명 생활 중이던 아인슈타인이 독일이 원자폭탄을 가지게 될 상황이 몰고 올 파국에 대비해 미국이 먼저 개발하기를 요구하는 계획서에 서명하고, 그렇게 오펜하이머가 실제로 원자폭탄을 개발하게 되는 맨해튼 프로젝트가 시작됩니다.


원자폭탄을 개발하던 중 독일은 패망하게 되지만 진주만을 공격해 온 일본과의 전쟁을 계속하고 있던 미국은 끝까지 프로젝트를 밀어붙이게 됩니다. 소련과의 관계가 급속히 냉각됨에 따라 소련이 미국보다 먼저 원자폭탄을 만들면 어쩌지 하는 공포도 작용했습니다.



X세대인 저는 “미국은 우리의 친구” 혹은 “세계 경찰”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한 세대입니다. 테러리즘과 싸우는 미국은 어린 제 눈에는 힘센 세계 경찰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미국의 이미지는 사실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하기 전까지는 볼 수 없는 미국의 정체성이었던 듯합니다. 유럽에 세계대전이 몰아치는 와중에도 미국은 지역적으로 전쟁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는 탓에 고립주의를 고수했고 실제로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하기 전까지는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미국에서도 유럽을 도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날이 높아져 가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러던 중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하고 그다음 날 미국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에 뛰어듭니다. 


이미 1차 세계대전을 통해 많은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던 미국은 2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과 프랑스가 본토와 자국령에서 일어난 세계대전으로 모든 것을 잃는 동안 오히려 전 세계 총생산량의 50%를 차지할 만큼 성장하게 됩니다. 자국 영토와 산업기반을 하나도 잃지 않고 오히려 그 기간 군수물자와 무기 등을 연합국에 대여 형태로 넘기거나 판매한 까닭입니다. 그렇게 세계의 가장 힘센 강대국으로 성장한 미국은 소련과의 냉전을 지나 현재까지도 막강한 영향력과 군사력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 힘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원동력이 미국이 지닌 핵무기입니다. 핵무기를 가진 국가는 자국을 보호할 힘을 가지게 되고, 핵무기를 쥔 국가 간의 긴장과 견제가 아이러니하게도 더 이상의 큰 전쟁의 발발을 막는 역할을 해 온 것입니다. 상대가 가진 핵무기에 대한 두려움으로 서로의 고삐를 잡아쥔 채 아슬아슬한 눈치싸움을 해오고 있는 것이지요.


영화<오펜하이머>는 이 모든 상황 속에서 작지만 결정적인 역할을 한 톱니바퀴인 오펜하이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런 세계정세보다는 이 작은, 그러나 가장 중요한 톱니바퀴로서 오펜하이머를 조명합니다. 오펜하이머로 분한 킬리언 머피의 침묵, 흔들리는 눈동자, 그가 보는 환영을 통해 영화는 관객에게 오펜하이머를 설명하기보다 느끼기를 요청합니다. 사람과 사람 간의 눈빛의 교환, 파문, 공간을 통해 분자보다도 더 작게 분열되며 끊임없이 파동을 일으키는 복잡 미묘한 사람 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역시 보아주기를 기대하지요.


자신이 만든 핵무기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조선족 3만 명을 포함한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을 본 오펜하이머는 그 이후로 반핵운동자가 됩니다. 애초 맨해튼 프로젝트의 시작을 촉구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이후 반핵과 군비감축운동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전쟁과 핵을 통한 공포가 아닌 인도주의적 평화를 부르짖은 그들의 목소리는 곧 매카시즘이 불러오는 또 다른 공포로 묻히게 됩니다. 대중은 빨갱이일지도 모르는 지식인들이 부르짖는 평화보다는 군비 확충과 군사력 증강을 통한 평화가 더욱 안전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미국 사회가 공산주의와 소련을 향해 가지고 있던 공포로 인해 오펜하이머가 주창한 반핵 노력은 지식인 빨갱이의 선동으로 받아들여지고 그는 오랫동안 그로 인해 고초를 겪습니다.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선물 중 하나인 평화가 아이러니하게도 공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현재 세계의 status quo는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평화’인가요.


연합감리교회 총감독회는 1986년 “창조 세계에 대한 옹호”라는 성명서에서 평화에 대한 성경적 토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평화를 의미하는 놀라운 히브리어 단어 샬롬은 구약 성경이 가르치는 핵심입니다. 하지만 샬롬, 즉 평화는 부정적으로 정의되거나 일차원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쟁이 없는 상황 그 이상입니다. 샬롬은 긍정적 평화입니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누리는 조화, 온전함, 건강, 웰빙입니다. 샬롬은 하나님이 낳으신 자연 상태의 인간 존재입니다. 그것은 사람과 하나님의 모든 창조 세계 사이의 조화를 의미합니다. 모든 창조 세계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든 생물, 모든 요소, 자연의 모든 힘은 전체 창조 세계를 구성합니다. 따라서 누구든 샬롬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이는 모든 사람의 샬롬이 약화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핵무기를 손에 든 채 샬롬을 노래하는 것을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에 평화를 주기 위해 오셨다는 성서의 말씀에 비추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영화관에서 <오펜하이머>를 보고 나오면서 느꼈던 혼란과 슬픔은 아마도 이러한 씁쓸한 현실에 대한 자각과 함께 그리스도인으로서 꿈꾸어 온 평화가 사실은 매우 갈 길이 요원함을 다시 한번 절실하게 깨달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8월 시카고에서는 세계종교협의회(the Parliament of the World Religions)가 열렸습니다. 큰 대회장의 한 편에 아름다운 미시간 호수가 한눈에 보이는 거대한 데크에는 하루 종일 작은 용광로가 파란 불꽃을 일으키며 돌아가고, 그 앞에는 대장간이 열려 원하는 이들이 대장장이의 도움을 받아 농기구를 만드는 체험을 해볼 수 있었습니다. 그 대장간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기부한 총을 녹여서 농기구로 만드는 프로젝트로, 이사야서 2장 4절 말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를 직접 실현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허황된 꿈 같은가요. 고작 총 몇 자루를 녹여 농기구를 만드는 ‘퍼포먼스’를 한다고 해서 세상에 평화가 오기는 하겠냐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 같습니다. 


1955년 버트런드 러셀과 아인슈타인은 함께 발표한 선언문에서 “인류의 구성원으로서 각자 스스로를 돌아보기를” 요청하며 “인간다움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모두 잊어버리라”고 호소합니다. 공포와 적대, 이해관계와 이익이 아닌 그저 인간다움만 기억하자는, ‘샬롬’이 의미하는 자연 상태의 온전한 인간이 되자는 호소입니다. 이 또한 허황된 말 같습니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수소폭탄으로 몇십만 명을 학살할 수 있는 긴장 상태에서 ‘인간다움, 샬롬’을 회복하자니, 현실적으로 가당키나 한가 싶습니다.


그러나, 이 허황된 꿈을 예수님이 꾸셨던 것 같습니다. 로마제국의 압제로 인해 고통받던 이스라엘에 오셔서 왼뺨을 때리거든 오른뺨도 돌려대고,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가주라고 하신 그 분의 말씀이, 바로 이 허황된 샬롬을 지금 이 순간 차근차근 살아내자는 하나님의 초청인 듯합니다. 예수께서 먼저 밀알이 되어 죽으시고 우리에게도 따르라고 요청했던 그 부르심이, 지금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이 평화를 이 땅에 불러오기 위해 따라야 할 요청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칼과 총이 농기구가 되어 밭을 매고, 그 밭에서 난 소산으로 모든 이가 배불리 먹고도 남음이 있으며, 어린 아이와 사자가 함께 뛰어노는, 이사야 선지자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의 ‘샬롬’을 통해, 한걸음 한걸음 지금 이 시간 다가오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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