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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오아시스 Jan 03. 2024

5일차. 안식처가 있다는 것

람베르 캠핑장에서 당연한 것들에 대한 행복을 느끼다

새로운 하루가 찾아왔다. 떠나기가 싫었다. 람베르에서 보낸 1박은 로포텐에서 보낸 날들 중 가장 편안했다. 똑같이 텐트에서 지내는 거지만, 외진 곳이 아니라 시설이 잘 구비되어 있는 곳에서 머무니 보호를 받는다는 느낌이 컸다. 거기서 오는 안정감은 나름 환경이 좋았던 부네스 해변과 비교해서도 큰 차이가 났다. 여행 중 하루는 예비 일정으로 악천후가 오거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날 등 여행하기 어려운 날이 닥쳤을 때 쓰려고 남겨 뒀는데, 이곳 람베르 캠핑장에서 사용했다. 처음 체크인했던 리셉션으로 가 추가 요금을 내고 하루를 연장했다. 사소한 고민들이 사라지니 홀가분하고 마음이 편해졌다.


오늘은 E10 도로를 따라 걸으며 플락스타틴드(Flakstadtind) 산까지 가 보기로 했다. 어제와 전혀 딴판인 날씨가 왠지 불안했다. 하루 전만 해도 하늘은 푸른 물감으로 칠해진 것처럼 쨍하고 맑았는데, 로포텐의 변덕스러운 날씨는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당장 비가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날씨에 우산을 챙겨 길을 나섰다.


람베르에서 플락스타드까지 가는 길은 시원시원하게 펼쳐진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전방에 시선이 닿는 곳에 안쪽으로 깊게 들어간 만이 있고 그 너머 해안선을 따라 산이 우뚝 솟아 있다. 만이 들어간 내륙 쪽도 산이 이어진 풍경이었다. 쭉 뻗은 도로와 탁 트인 풍경은 개방감을 안겨주었다. 도로변에서 천천히 걷고 있을 때, 옆으로 수십 대의 차들이 지나쳐갔다. 그중에는 캠핑카도 있었다. 시원하게 달리는 차들을 보니 나도 질주하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쳤다. 


TV속 광고를 보다 보면 별다른 인상을 남기지 못하는 광고가 있는가 하면, 깊은 인상을 남기는 광고가 있다. 그런 광고를 보면 기억에 오래 남고, 광고의 대상이 된 제품을 구매하기에 이르기도 한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이 그런 잘 만든 광고의 한 장면인 것 같았다. 광고의 대상은 넓게 보면 자동차, 좁게 보면 캠핑카이다. 그 장면을 보며 언젠가 로포텐에 다시 온다면 그땐 캠핑카를 타고 여행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으니, 그 광고는 성공적이었다.


도로를 따라 한적한 구간을 지나니 마을 입구에 다다랐다. 여행을 왔는지 도로 옆 공터에 주차되어 있는 대형 버스와 캠핑카가 보였고, 바닷가에는 파란 텐트 한 채도 보였다. 그 뒤에도 캠핑장이 있는데, 람베르 캠핑장보다는 캠퍼가 적어 보였다. 캠핑장이 아닌 해변가에 박지를 차린 캠퍼도 보였다.


플락스타틴드로 올라가는 등산로는 공터 맞은편에 나 있었다. 높다란 전신주 밑으로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 있는데, 이곳이 시작점이라는 것을 미리 확인하고 왔어도 등산로가 뚜렷하지 않아 긴가민가했다. 천천히 걸어가며 주변을 둘러보니 등로란걸 알리는 표식과 이정표가 나타났다. 확신을 가지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곳은 누번 산보다 두 배는 높지만, 경사가 심하지는 않아 숨은 다소 차도 충분히 갈 만했다.


얼마간 오르자 산 중턱에 너른 평지에 다다랐고, 정상인 것으로 추측되는 곳이 올려다보였다. 그 중간 지점인 평지에 다다랐을 때 비가 꽤 내리기 시작했다. 굵은 비는 아니었지만, 물구멍이 아주 촘촘한 샤워기를 강하게 틀어놓고 맞는 느낌이었다. 어느새 깨끗하게 보였던 풍경도 구름에 가려 희미해졌다. 


산 정상은 서서히 몰려온 구름이 짙게 드리워 꼭대기가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잠잠했던 공기의 흐름도 자극을 받았는지 강한 바람을 불어댔다. 우산을 쓴 채로 그 자리에 멈춰서서 점점 뿌예지고 흐려지는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먼 거리를 걸어 중턱까지 온 게 아까워서라도 올라가고 싶었지만, 가시거리가 좋지 않고 땅이 미끄러울 것이 우려되어 이만 하산하기로 했다. 여기까지 걸어오는 길에 만났던 풍경들은 실컷 즐겼으니 그것에 만족했다.


비를 뚫고 걸어 돌아가는 길은 여기까지 왔을 때보다 더 멀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편하게 몸을 기대고 머물 곳이 있다는 것에 마음이 편해졌다. 비를 맞아 쫄딱 젖는다고 해도 따뜻한 물로 편하게 씻을 수 있는 샤워실이 있고, 소꿉놀이 장난감같은 미니 코펠이 아닌 아늑한 실내 주방에서 그래도 넉넉하게 음식을 해먹을 수 있는 현실은 발걸음을 더 이상 무겁지 않게 만들었다.


캠핑장에 거의 다다랐을 쯤, 비가 차츰 잦아들었다. 우산을 접고 해변을 거닐며 캠핑장으로 향했다. 그냥 걷자니 왠지 심심해 등산 스틱을 모래사장에 끌며 장황한 낙서를 했다. 양 옆으로 선을 그어 길처럼 만들고 가운데에 영어로 ‘행복의 길’이라고 적었다. 로포텐에서, 람베르에서 머물며 느낀 속마음이 그대로 튀어나왔다. 나 뿐만 아니라 이 길을 걷는 사람이 행복하기를, 이미 행복하다면 더 행복해지기를 하는 마음이 들었다. 로포텐에서 난생 처음으로 백패킹을 하며 내가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이 강하게 느껴졌고, 그 자체에 감사했다. 그리고 모든 게 불편한 노지에서 지내다 기본 시설이 갖춰진 캠핑장에서 지낸내는 것은 그야말로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시설이라고 해 봤자 여태껏 살면서 마땅히 누린 것들이었다.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당연한 것들에 이처럼 행복을 느낀 적이 있었나. 그것은 당연한 것들로부터 오는 소중함을 깨달으며 비롯된 것이었고, 저절로 내 속마음이 툭 튀어 나왔음을 느꼈다. 애석하게도 금세 파도가 밀려오며 길은 흔적없이 사라졌다. 영원한 행복 또한 없다. 당장 지금 느끼는 행복 또한 내일부터 다시 야생으로 들어간다면 마음 한 구석의 저편으로 잠시 사라질 테니. 그래서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저녁은 어제처럼 번프리스에서 간단한 식재료를 사다가 소세지 수프를 끓여서 곁들여 먹었다. 그리고 시간 착오로 사지 못했던 맥주도 이번엔 여유있게 가서 노르웨이 산으로 한 캔 집어왔다. 텐트에서 코펠에 끓여먹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밥상이지만, 아늑한 실내와 테이블은 한껏 여유로운 저녁 식사를 가능하게 해 주었다. 여행자에겐 더없이 든든한 안식처이기에 누릴 수 있는 것이었다. 내일이면 파도에 휩쓸려 간 모래사장의 길처럼 자연스레 흩어 없어질 람베르 캠핑장에서의 행복을 맘껏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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