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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규호 Jan 08. 2024

6일차. 초심자의 오판

어렵게 올라간 정상에서 멋진 풍경을 만났으나 잘 곳을 찾지 못하였다

새로운 하루가 찾아왔다. 종일 하늘이 밝다 보니 하루가 안 가는 것 같지만, 여행도 어느덧 후반에 접어들었다. 람베르 캠핑장에서 보낸 2박은 그야말로 사막 위의 오아시스같았다. 캠핑장이 주는 안락함은 레이네에서 머물렀던 숙소 못지 않았다. 레이네 숙소 가격의 1/4만 들여 편하게 텐트를 치고, 바로 앞의 멋진 바다에 나가 수평선을 보며 거닐고, 걱정했던 용변과 샤워 해결은 물론 음식까지 편하게 해 먹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인적 드문 호숫가나 바닷가에선 느끼기 어려웠던 ‘안전함’도 캠핑장에서 보낸 날을 더욱 안락하게 해 주었다.


마음 같아선 아예 여행 내내 람베르에 눌러앉고 싶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정들었던 람베르 바다와 작별했다. 오늘 야영지는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볼란스틴덴(Volandstinden)이다. 고민을 좀 했으나, 레이네브링겐을 포기한 아쉬움을 달래려 넣었다. 사전 조사를 해 보니 레이네브링겐 못지 않게 풍광이 멋져 보였다(로포텐은 어딜 가나 그림이지만 말이다). 레이네브링겐을 과감하게 올라갔더라면 아마도 찾지 않았을 곳이다. 혹은 날씨가 궂었더라면 패스했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오후 3시까지는 비가 온다고 예보되어 있었지만, 이후부터 다음날 오전까진 특별히 비 예보가 없어 등산을 하고 산 위에서 야영하기로 결정했다. 캠핑장을 빠져나와 E10도로를 따라 왔던 길로 2.5km를 내려가니 작은 삼거리가 나왔다. 갈림길로 빠진 후에 등산로가 시작되는 지점까지 걸어갔다. 길 중턱에서 뒤를 바라보니 가파르고 험한 산맥이 쭉 뻗어 있었다. 그 모습이 흡사 사자가 엎드린 풍경같기도 했다. 


길을 따라 다소 오르막진 구간을 올라가니 작은 건물 한 채와 큰 대구 덕장이 나왔다. 그 오른쪽으로 전신주가 쭉 이어지고 등산로 입구가 나왔다. 조심스레 울타리 역할을 하는 작은 문을 끼익 밀고 들어갔다. 왠지 이 문이 있으니까 비밀스럽고 출입이 제한된 구역에 몰래 들어간 것 같았다. 


볼란스틴덴은 다른 산에 비해 산세가 드라마틱했다. 고도에 따라 산의 특징이 확 달랐다. 이 산은 크게 세 단계로 구분이 딱 되었다. 1단계는 초입에서 산 중턱에 있는 작은 목조 대피소까지다. 2단계는 대피소부터 전신주를 따라 난 산길이다. 경사가 제법 급하고 바위와 돌이 노출되어 있어 길이 험하다. 3단계는 방향을 틀어 정상으로 가는 마지막 구간이다. 정상 부근에 바위가 무더기로 깔린 구간이 있다.

목조 대피소. 다음 날 이른 오전, 구름이 잔뜩 걸렸을 때 찍었다.
대피소를 지나면, 전신주를 따라 가파른 산길이 이어진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평탄한 길이 한동안 이어지다 돌무더기 길이 나타난다.


대피소에 도착해 근처에 흐르는 냇물을 받아 식수를 보급하고, 잠시 휴식을 가진 후 호기롭게 정상을 향해 올랐다. 그러나 거친 두 번째 구간을 오를수록 몸이 점점 버겁다는 게 느껴졌다. 그동안 여행으로 피로가 쌓인 상태에서 무거운 배낭을 신경쓰며 거친 산길을 오른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허리에도 조금씩 무리가 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미 먼 길을 올라왔다. 정상을 향해 그대로 직진했다. 중턱의 평지 구간에선 배낭을 내려놓고 산 아래로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며 잠시 숨을 돌렸다.


헛디디면 발을 접지를 수 있는 바위 구간을 너머 정상에 도달했다. 꼭대기 끝에서 내려다보이는 섬의 풍경은 가히 장관이었다. 앞서 머물렀던 람베르에서 불과 3km쯤 떨어진 곳이지만, 그때 오른 누번 산보다 더욱 높고 풍경이 보이는 각도가 달라 느낌도, 질감도 모두 달랐다. 바다 위에는 마법이 펼쳐진 것처럼 섬들과 다리가 흩뿌려지듯 펼쳐져 아름다운 모습을 자아냈다. 손을 뻗으면 쉽게 닿을 것만 같을 정도로 짙은 구름이 낮게 깔려 색채가 흐렸던 게 아쉬울 뿐이었다. 

이틀을 머물렀던 람베르 해변도 보인다.


넉넉히 풍경을 즐기고 나니 슬슬 잠자리가 걱정되었다. 사전에 찾아본 로포텐 여행 정보 사이트에 따르면 창조적인 백패커라면 이 산의 정상에서 박지를 구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정상에 텐트를 칠 만한 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정상은 폭이 좁아 등산로 외엔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몹시 당황하여 잠시 고민하다가, 그래도 올라왔으니 기울어졌어도 최대한 텐트를 쳤다. 하지만 이 기울어진 땅에서 생활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소세지 수프를 끓여먹다 코펠을 잡은 손을 놓친 바람에 쏟기도 했고, 제대로 누워있기도 쉽지 않았다. 난 이제 막 6일째 텐트를 치고 자는 초보 백패커일 뿐이고, 창조적이기도 당연히 힘들었다. 


결국 정상에서 잠을 청하지 못하고 뜬눈으로 자정을 넘겼다. 그러다 새벽 2시쯤, 아래 대피소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낫겠다 싶어 결국 텐트를 거두고 배낭을 쌌다. 눈을 뜨면 그림같은 풍경이 펼쳐지는 정상에서의 하룻밤은 없었다. 차라리 아래에 텐트를 펼쳐놓고 가벼운 몸으로 정상에 올라 풍경을 즐기며 시간을 보내다 홀가분하게 내려오면 그만인 것을, 괜히 정상의 텐풍을 욕심내다 한숨도 못 자고 몸과 마음이 지칠 정도로 나 스스로를 혹독한 상황에 빠뜨리고 말았다. 현재 내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욕심만 냈다가 맞이한 처량한 결말이었다.

결국 중턱 대피소로 내려와 밤을 지새웠다.

불행 중 다행은, 얼음장같이 차가운 공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지금은 해가 떨어지지 않는 한여름의 백야라는 것이다. 9~10월 정도였으면 깜깜했을 것이고, 철수하여 하산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 너무 다행스럽게도 하루 웬종일 해가 떠 밝은 덕택에, 그만큼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았다는 것이다. 어두울 때보단 어떤 변수가 발생했을 때 보다 수월하게 대처할 수 있다. 여전히 환해 하산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었고, 밝음이 주는 안도감은 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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