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한 대가 눈앞에 섰다
마넌 산에서 내려오니 어느덧 오후 두 시였다. 다음 박지로 가기 위해 텐트를 걷었다. 해변까지 한참을 걸어 왓던 어제와는 다르게 마음이 조금 홀가분했다. 휴일이 끝나고 월요일이 왔기 때문에 해변까지 버스가 들어오기 때문이다. 버스는 내가 힘겹게 걸어왔던 2시간 거리의 길을 단 10분 만에 주파했다. 걸어오며 보았던 풍경이 스무 배는 빠르게 버스 뒤로 사라져 버리니 왠지 허무한 마음도 들었다.
오늘 향할 곳도 버스가 자주 드나드는 곳은 아니다. 레크네스에서 약 4km 떨어진 지점에 오늘의 목적지, 유스타틴드(Justadtind) 등산로 입구가 있다. 먹을 거리를 손에 한 봉지 들고 정류장에 앉아 버스가 오길 기다렸다. 앉아서 몇 분쯤 기다리고 있는데, 한 아주머니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이것저것 물어보며 말을 건네셨다. 여행 중에 현지인과 여행자가 할 수 있는 평범한 대화가 오갔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담배를 뻑뻑 태우며 범상치 않은 포스를 자아낸 아주머니는 내가 내릴 정류장이 다가오자 여기서 내리면 된다며 손짓과 함께 배웅을 해 주셨다.
정류장에서 내리자 맞은편에 등산로로 진입하는 짧은 아스팔트 길이 나왔다. 근처에는 차 열 몇 대는 충분히 세울 만한 주차장을 비롯해 세면대와 변기가 있는 깨끗하고 제법 큼지막한 화장실이 있고, 산장 같은 숙소도 보였다. 지도상에는 근처에 숙소가 서너 군데가 나타나 있었는데, 사람들이 어느정도 찾는 산인 듯했다.
등산로가 다른 곳보다 긴 만큼 경사가 완만해 오르는 데 큰 불편함이 없이 편안했다. 얼마간 걸어가니 주위가 뻥 트여 있으면서 고도가 제법 높아 레크네스의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지점에 다다랐다. 오후 7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백야에선 여전히 한낮이었다. 간만에 구름도 제법 걷혀 햇빛이 그대로 내리쬐었다. 로포텐에 온 후에는 맑은 날에도 구름이 두터워 해를 보기가 통 힘들었는데, 계속 내리쬐는 햇빛을 맞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우리와는 다른 낯선 자연현상과 풍경 아래에 서 있으니 행복하고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등산로는 중반까지도 걷기가 편했다. 트레일 곳곳에 돌들이 박혀 발에 때때로 피로했지만 걷기 힘든 정도는 아니었다. 완만한 오르막을 한참 오르다 보니 어느새 제법 높은 중턱까지 왔다.
파란 하늘도 잠시, 저편에서 산능성을 훑으며 먹구름이 밀려왔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았다. 등산로 중턱에서 비박할 곳을 계속 둘러봤다. 유스타틴드 산은 고도가 738미터로 로포텐에서 올랐던 산 중에 가장 높으며, 등산로도 길어 이대로 정상까지 가는 건 무리가 있었다. 가이드처럼 끼고 살았던 여행 정보 사이트에 이곳 정상은 사방이 트여 있어 캠핑을 하려면 주의가 필요하고, 물을 구할 수 없다고 되어 있었다. 캠핑을 아예 할 수 없다는 말은 없었지만, 볼란스틴드 산에서 겪은 시행착오를 통해 내 수준에 어긋나는 무리한 행동은 절대 하지 않기로 했다.
‘트레일을 따라 물이 가까이 있는 박지를 찾을 수 있다’는 사이트의 말을 새기며 적당한 곳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어느 오르막을 지나자 그 뒤에 숨어있던 광활한 평지가 나타났다. 등산로의 왼쪽엔 커다란 호수도 보였다. 그 이후로는 다시 높은 오르막이 나타났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호숫가에 텐트를 펼쳤다. 바닥은 작은 나무 같은 풀로 가득했지만 오히려 푹신한 느낌이 있어 몸을 눕히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텐트를 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슬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늘도 수프에 소세지를 큼지막하게 썰어 끓였고, 샐러드와 참치, 맥주와 함께 고단한 하루의 피로를 씻어냈다.
이튿날은 오전부터 비가 조금씩 흩뿌렸다. 날씨가 갤 생각을 안 했다. 정상까지 올랐다가 하산해 버스를 타려면 서둘러야 했다. 날씨가 그나마 괜찮아진 틈을 타 정상으로 향했다. 그 사이 날씨는 갰지만, 살이 베어나갈 것 같을 정도로 강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정상까지 올라가지 않고 적당한 곳에서 주변 경치를 즐겼다. 정상이 아니어도 사방이 열려있다 보니 로포텐 제도의 멋진 풍경들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바다에 섬과 산들이 솟아있는 모습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생물처럼 보였다.
하산길엔 이따금 등산을 하는 사람들과 마주쳤다. 멀리서 산을 오르던 한 여자가 큰 소리로 나에게 외쳐왔다. 하지만 강한 바람에 묻혀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잘 안들린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조금 가까워지자 다시 물어왔다. 조금 전보다는 소리가 커졌지만 그래도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가까이 마주해서야 나는 또래쯤 되어 보이는 그 여자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위에도 바람 많이 부나요?”
“네, 바람이 강하고 엄청 추워요!”
그러더니 약간 난감한 기색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등산을 이어갔다. 베이스캠프를 차린 산 중턱은 괜찮았는데, 정상 부근의 바람은 눈도 제대로 뜨기 힘들 정도로 거셌다. 하지만 지금 문제는 날씨보다 시간이었다. 최종 목적지인 스볼베르로 가는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했다. 여러 변수가 겹쳐 등산 전에 마음먹은 것에 비해서는 아쉬운 마무리였다. 1분이라도 아낄세라 서둘러 텐트를 걷고 땅만 보며 빠르게 하산했다.
등산로 입구에서 레크네스 버스터미널까진 약 4km. 이 시간대엔 터미널로 가는 버스 편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걸어가야 했다. 버스 시간까진 1시간 남짓 남았는데,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걸어갈 생각을 하니 한숨만 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도 버스를 놓치면 몇 시간은 기다렸다가 오후 9시 무렵에나 있는 편을 타야 했다. 여행 초반에 몇 시간을 꼼짝 않고 기다린 기억이 있다 보니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해가 지지 않으니 이동에 큰 제약은 없을 지라도 박지에 가서 텐트를 치고 바람을 쐬는 게 낫지, 정류장에 한동안 발이 묶인 채로 있는 것은 꽤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야속했다. 맨 몸이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갈텐데. 열흘간 등산과 이동을 반복하며 몸이 많이 뻐근해졌다. 제시간에 버스를 타는 게 최고이지만, 못 타도 일단 가자는 생각으로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등산로를 완전히 빠져나와 큰 길로 접어들어 갓길을 따라 200m쯤 걸었을까. 뒤에서 승용차 한대가 슝 하고 내 앞을 지나가더니 갓길에 멈춰섰다. 그리곤 운전자가 나에게 손짓하며 불렀다. 괜히 불렀을 리는 없을 테고, 설마 태워주려고 하나 싶었다. 나는 일단 보조석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 운전자가 말을 건넸다.
“레크네스에 가요?
“네! 레크네스 버스 터미널에 가야 해요.”
“데려다 줄까요?”
“정말요? 실례가 안 된다면 그래도 될까요?”
“네, 괜찮아요. 타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의도치 않게 히치하이킹을 했다. 아니, 히치하이킹을 ‘당’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히치하이킹은 레크네스에서 9km 떨어진 허클랜드 해변에 갈 때도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당연히 다른 여행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히치하이킹을 하는 여행자를 보면 늘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히치하이킹을 할 용기만큼은 도저히 나지 않았다. 앞서 람베르 해변에서도 종이에 커다랗게 목적지를 적고 히치하이킹을 시도하는 백패커를 봤을 때도 똑같은 감정이었다. 그래서 선뜻 건네온 호의에 얼떨떨했다.
그의 이름은 에밀. 나보다 나이가 몇 살은 많은 형님 같았다. 덴마크 출신으로 로포텐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꽤 반가워했는데, 친척 중에서 한국과 인연이 있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얘기를 나누는 사이 레크네스에 도착했고, 나는 터미널 근처 종합 쇼핑몰 앞에 내렸다. 나는 연신 감사하다고 말을 건넸다. 한껏 상기된 목소리로 “저 정말 신을 만난 것 같아요”라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그는 “하하” 하고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맙다며, 여행 잘 하라는 마지막 말로 대화가 끝났다. 짧은 인연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뒤늦게 뭐라도 드렸어야 했는데, 아쉬움이 남았다. 한국을 떠울릴 수 있는 작은 기념품을 건넸다면 그에게도 좋은 추억으로 남을 텐데, 할 수 있는 건 인사밖에 없었다. 그는 그날을 기억하고 있을 지 알 수 없지만, 나에겐 생명의 은인같아 평생 잊지 못할 사람이다. 그렇게 나는 마지막 목적지, 스볼베르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