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정글, 인생은 쇼

<반칙왕, 2000>

by 떠돌이별

"정말 오랜만인데, 내가 뭘 이렇게 열심히 신나고 즐겁게 해 본 적이 없어요."


은행원 대호는 반복되는 지각과 저조한 실적으로 인해 부지점장에게 매일같이 언어적 폭력과 협박을 당한다. 그 끝엔 늘 헤드락이 찾아온다. 자존심 상하게도 본인보다 작고 나이 든 부지점장의 헤드락에서 벗어날 힘 조차도 없다는 사실이다. 회사에서 심하게 욕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던 어느 날, 대호는 운명처럼 체육관을 지나치게 되고, 그저 기습 헤드락을 방어하겠단 일념으로 레슬링을 시작하게 된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듯한 표정으로 사람들로 꽉 찬 지하철에 몸을 우겨넣고, 그럼에도 매번 지각을 면치 못해 면구스럽게 자리에 착석하는 모습을 보면 이 인물이 얼마나 지독한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가를 엿볼 수 있다.


아니 욕 먹는 게 싫고 실적을 올리고 싶다면, 일찍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열정을 다해 영업을 하면 될 거 아닌가? 안 된다. 그냥 불가능하다. 동기부여 없이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버린 직장인에게 그런 일은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며, 하여간에 작은 변화라도 일어날 수가 없다. 작은 해방감은 예쁜 직장 동료에게 들이댈 타이밍을 노리거나, 퇴근 후 친구와 술을 마시는 것으로 소심하고 한심하게나마 표출될 뿐이다.


체육관에 등록하는 것조차 용기가 없어 몇 번을 어슬렁 거리고, 골목길에서 만난 동네 양아치도 이기지 못하며, 집으로 돌아가면 정신 못차린 아들로써 아버지의 호통을 듣는다. 대호는 이렇게 매사에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직장인이다. 돈을 벌고 먹고 산다는 일은 왜 이렇게 사람을 별 볼일 없고 쫌스럽게 만드는 지.




"여기서만큼은 내가 왕이다. 링 위에서만큼은 누가 뭐래도 왕이다..!"


대호는 레슬링을 통해 쫌스런 자신에게서 그간 숨겨져왔던 페르소나를 발견하게 된다. 신체가 건강해져 누구든 패버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은 물론이고, 신기술에 몰입하며 혹독하게 훈련하는 자신의 열정을 마주하며, 의외의 재능을 발견하기까지 한다. 바로 창의적인 도구와 재치있는 스킬로 반칙을 구사해 링 위에서의 살벌한 투쟁을 관중들이 즐길만한 쇼로 만든다는 것.


우스꽝스런 가면을 쓰고 포크와 병따개를 가슴팍에 숨겨가며 대호는 프로 레슬러로 데뷔하게 된다. 어설픈 마당극 같이 치뤄지는 경기 끝에 대호는 자신감도 붙고 행복해 보인다. 그 쯤 해서 대호는 그간 숨겨왔던 레슬러로써의 정체를 주변에 드러내기로 한다. 다시 만난 동네 양아치들에게는 본때를 보여주고, 친구 두식과 아버지에게도 조심스럽지만 진지하게 레슬링을 한다고 밝힌다. 이때는 히어로 무비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 반드시 '울트라 타이거 마스크'를 착용해야만 한다. 정체를 숨기고 다른 사람이 되는 게 제법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 같다.


이처럼 아직까지 반칙왕 대호의 페르소나는 은행원 대호와 분리되어있다. 마스크가 없이는 용기가 나지 않는다. 심지어는 직장 동료 은희 씨 앞에 설 때도 마스크를 쓴다. 하지만 그녀에게 대호는 회식 자리에서 불쾌하게 찝쩍대다가 별안간 마스크를 끼고 집 앞에 나타나 사랑해왔다고 고백하는 변태일 뿐이다.


은희 씨가 그랬던 것처럼 주변의 반응은 냉담하다. 대호가 레슬링을 하든 말든 그들이 무슨 상관이랴. 레슬링이 축구처럼 대중적인 종목도 아니거니와 월드챔피언쉽을 딴 것도 아니다. 대호의 비장한 마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니 뜯어 말릴 일도 못 된다. 본인이 하고 싶으면 하는 거고 아니면 마는 거다.


그 동안 남의 집 얹혀 살듯 눈치보며 제 인생을 살아왔던 대호. 세상 사람들은 내 인생에 별로 관심이 없고, 의외로 자기의 인생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한편, 대호에 비해 은행에서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던 두식은 어느 날 불같이 화를 내더니 회사를 때려친다. 참기만 하는 회사원의 최후일까? 일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한 날, 머릿속에 다 때려치우고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떠나는 상상을 할 때 같다.




"반칙 선수는 기술 걸려서 지든가 반칙 걸려서 지든가 둘 중에 하나야."


대호가 갈고 닦은 실력으로 출전하는 대망의 경기는 이미 승부가 조작된 판이다. 체육관 관장은 돈이 필요해서 연출된 게임에 내보낼 반칙 선수로 대호를 준비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고, 대호는 스타 레슬러 유비호와의 매치에서 볼만한 게임을 진행하다가 정해진 타이밍에 승복을 선언하면 된다.


어쨌든 지는 게임이다. 그럼에도 필사의 의지로 링 위에 오르는 이유는, 자기 자신에게 뭔가를 증명해내고 싶은 마음에서다. 그리고 갑갑한 현실에 반칙으로나마 내 인생의 악당을 물리쳐버리고 싶은 해방감 때문이다.


생각보다 경기는 치열하게 진행되고, 마침내 대호가 쓰러진 순간. 유비호는 완벽한 승리의 의미로 대호의 마스크를 벗기려고 한다. 마스크 안의 진짜 자신이 드러나려 하자, 대호는 짜고 치는 고스톱인 판을 거부하고 죽을 힘을 다해 반격을 가하기 시작한다. 경기 장면은 거의 리얼타임으로 보여진다. 강적인 유비호에게 이판사판 달려드는 대호의 모습은 통쾌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처절하다.


송강호의 첫 장편영화 주연작이자, 이제는 대배우가 된 연기자들의 비중 없는 역할들, 아무리 연기라지만 링 안팎을 넘나들며 죽어라고 싸우는 두 인물을 보며, 우리 모두 저마다 가면 아래 치열한 싸움을 벌이며 살고 있다는 걸 새삼 떠올린다.


경기는 패배로 끝났지만, 대호는 이제 가면을 벗고 싸울 대상과 마주할 줄 알게 된다. 바닥에서 미끄러지더라도, 부지점장에 정면으로 주먹을 겨루기는 한다는 말이다. 어차피 불공평한 세상, 반칙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이 블랙 코미디가 마냥 웃기지만은 않다.


20년도 더 된 영화인지라 흐름도 느리고 다소 과장된 연기들이 어색한 면도 있다. 하지만 개인이 위축되지 않고는 적응하기 어려운 정글 같은 한국사회에서 레슬링 쇼처럼 한 방을 날려보겠다는 비유는 지금에도 충분히 유효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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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칙왕>은 의외로 실화 기반 영화인데, 한일은행 은행원이면서 동시에 20년 간 프로레슬러로 이중 생활을 해온 백종호 씨의 이야기라고 한다. 요즘 시대에 직업 외의 다른 페르소나를 갖고 살아가는 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라지만, 회사가 인생의 전부나 마찬가지였을 당시엔 신선한 돌파구로 느껴졌을 법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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