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리히터, 이 무지치가 귀에 안 들어온다고??
바흐를 비롯한 나의 바로크 음악 취향은 좀 쓸데없는(?) 고집이 있다. 바로크 작품들은 강박적일 정도로 시대악기 연주만을 찾아 듣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나는 한 때 비발디 사계를 입문자들이나 듣는 질낮은 곡이라고 속으로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생각은 파비오 비온디의 연주를 들음으로써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비온디가 구사하는 혁명적인 연주가 사계를 범작으로 여긴 내 생각을 완전히 바꿔 버린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이런 요상한 생각을 심어 준 주인공은 비발디 사계와 거의 동의어로 인식되는 이 무지치라는 연주단체였다. 그럴 만도 하다. 처음부터 비발디 사계로 각광을 받았고, 한술 더 떠서 그들은 잊을만하면 한국에 와서 사계를 연주한다. 이러다 보니 나중에는 "저 양반들은 돈 떨어지면 한국 와서 사계 연주하고 돈벌어 가나?"는 생각까지 했던 적이 있다. 바흐에서도 내겐 비슷한 습관이 있다. 마태 수난곡의 경우 아마 수십 종류의 연주는 완곡으로 들어본 것 같다. 그러나 하나같이 1티어 명연으로 꼽히는 칼 리히터의 연주는 내가 이 거대한 작품을 처음 접할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완곡으로 들어본 적이 없다. 완곡은 고사하고 10분의 1 듣기도 버거울 정도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도 칼 리히터의 마태 수난곡 전곡에 도전해봤지만, 역시 끝까지 듣지 못했다. 다만 평소보다 좀더 오래는 갔다. 1부를 다 듣고도 20분 정도 더 갔으니까.
다른 작품들도 마찬가지다. 시대악기 연주라면 언제 들어도 맛깔나고 재미있는 바흐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이나 관현악 모음곡, 헨델 수상음악, 왕궁의 불꽃놀이 등의 작품들을 현대악기 연주로 들으면 5초도 안되어 하품이 막 터져 나오곤 한다. 이런 작품들을 시대악기 연주로 들으면 악보가 머릿속에 성부별로 딱딱 그려지는재미가 있는데, 현대악기 연주들은 이런 맛이 1도 없다. 사실 독주 악기로 가면 좀 덜하다.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나 바이올린 파르티타, 건반악기 작품들은 현대악기냐 시대악기냐를 상관하지 말고 그저 좋아하는 연주자 따라가면 된다. 독주로 가면 어느정도 연주자 개인의 자유로움이 보장되니까 선호하는 연주자 따라 가면 그것대로 재미있지 않은가? 그런데 복수의 연주자가 모여 연주하는 앙상블로 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현대악기로 연주하면 영 재미가 없다. 현대악기로 연주한 바로크 작품들, 특히 명반으로 회자되는 음원들이 객관적인 연주력이 시대악기 연주보다 못한 것이 아니다. 그 연주들도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았기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게 아니겠는가? 이건 지극히 주관적인 영역이다.
한 때는 시대악기로 연주된 바로크 연주만을 골라 듣는 나의 컬렉션에 나름대로 자부심을 느끼면서 현대악기 연주로 된 음원들을 굳이 찾아들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고 그런 사람들을 솔직히 말해 좀 깔볼 때도 있었다. 이건 회개하듯 고백건데, 삐뚤어진 우월감이고 자부심이었다. 지금은 내가 그토록 멀리 했던 현대악기 바로크 작품 연주가 가슴으로 파고들어올 시점이 언제일까 참 궁금해진다. 그런데 그런 순간이 나를 끝까지 외면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음악을 오래 듣다 보면 오랫동안 쳐다보기도 싫었던 작품이 어느 순간 어떠한 저항도 없이 너무도 쉽게 가슴으로 훅 들어오는 경우는 매우 흔하니까.
이 무지지 단원 여러분, 칼 리히터 할아버지.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제 귀가 열릴 때까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