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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뮤지션 Oct 28. 2018

연역법의 마법

피아노를 다시 치기에 늦었다고 생각하는 분들께



어느 일반인은 어떻게 피아노과 대학원을 뚫었나
 솔직히 고백하건데 나는 어떻게 보면 말도 안되고, 어떻게 보면 동화같은 과정을 거쳐 서른셋의 늦은 나이에 피아노 전공으로 뛰어들었다. 음악과는 전혀 상관없는 과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꼴랑 석 달 준비하고 대구의 한 음대의 대학원에 들어갔다. 물론 피아노 전공에 지원한 사람이 나 혼자 뿐이었다는 행운이 있었지만, 대학원 입시는 학부 입시보다 준비해야 할 곡의 분량이 많다는 걸 생각해 본다면, 아직도 내게 무슨 마법이 일어났나 싶을 때가 많다.

 어떻게든 대학원을 뚫은 뒤, 나는 한동안 원래 전공자였던 사람들에 비해 테크닉이 딸린다는 열등감에 시달리곤 했다. 설상가상으로 첫 학기에 만난 레슨 선생님은 나와는 성향이 완전히 반대였다. 그래도 음악을 너무나 사랑한다는 큰 대의명분 아래 끈질기게 버티고 또 버텼다. 그러자 답이 보이기 시작했다. 일단 내가 연주하려는 음악에서 어떻게든 이미지를 뽑아내고 그것을 손으로 이야기하려고 애썼다. 다행히 이건 내게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원래부터 들어봤던 음악들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음악의 큰 그림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은 쉬웠다.

한 줄기 서광, 네이가우스의 한 마디
 그러던 도중, 나의 이 생각에 확신을 주는 문구를 발견했으니, 러시아의 전설적인 피아노 레스너로 명성을 떨친 네이가우스가 한 발언이었다. “음악적 확신이 높을수록 기교적 어려움은 낮아진다”. 눈이 뜨이고 귀가 열리고 손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열등감의 원인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테크닉 교재 하농, 피쉬나를 거의 손대본 적이 없다. 그나마 하농은 앞부분까지라도 했지만, 가장 중요하다는 스케일 부분은 손조차 대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깐깐한 선생님들이 보기에는 기본도 안되어 있다고 생각할 법한 상태였던 내가 베토벤 소나타 두 곡, 쇼팽 발라드, 슈만 판타지와 같은 굵직굵직한 대곡들을 어떻게든 쳐내고 있었다. 물론 앞의 두 곡을 익히는 데는 적지 않게 고생을 했다. 하지만 내가 스무 살 이후 오매불망 꿈꿔온 곡인 슈만 판타지를 장기간 파고 들어가자, 이제는 피아노가 재미있다고 생각이 들기에 이르렀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슈만 판타지는 장대한 규모에 테크닉적으로도 상당히 난곡이다. 나 같은 상태라면 이건 구구단도 모르는 상태에서 미적분을 풀겠다고 덤비는 거나 다름이 없다. 그런데 내겐 적어도 이 음악의 심상에는 120퍼센트 공감할 수 있었다. 앞에서 길게 풀어 이러쿵저러쿵 언급했지만, 결국 결론은 이것이다. 심상을 공감하는 행위, 오직 이것 하나 바라보고 이 장대한 곡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철저하게 연역적인 방법이다. 이 심상을 따라가다 보니, 이 곡이 요구하는 테크닉에 손이 따라오는 마법같은 체험이 가능했다. 이 방법에 제대로 맛들린 나는 이후 누군가에게 피아노를 가르칠 때 기술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심상을 적당히 개그 섞어 “드립치듯이”설명하는 방식을 주로 택하곤 한다. 예를 들면, 쇼팽 녹턴 2번 첫 페이지에 나오는 오른손의 뜬금없는 포르테를 어떻게 표현하는가 하는 걸 “길거리를 걷다가 잘생긴 남자랑 눈 마주쳤다고 상상해보라”고 한다던가( 이런 멘트는 특히 젊은 여자라면 직빵으로 먹히는 멘트다!).

연역법은 알고보면 대가들의 방법이다
 유명한 피아니스트들도 내가 택한 방법인 연역법으로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세계적인 거장으로는 리히터, 아르헤리치 등이 있고,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는 피아니스트로는 손열음이 전형적인 연역법으로 음악을 만드는 피아니스트다. 특히 손열음 씨의 경우는 나와 오랜 기간 개인적인 교류도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음악을 만드는 스타일이 현미경처럼 보인다. 그녀는 일단 레퍼토리가 대단히 넓고 그 많은 레퍼토리에 맞는 터치와 해석을 기가 막히게 집어 넣는다. 그리고 어떤 곡을 연주하든 명확한 스토리텔링이 존재하는데, 이는 엄청난 독서량과 웬만한 작가들을 가벼이 능가하는 그녀의 필력에 그 근본이 있다. 머릿속에 풀어낼 이야기가 많으니, 당연히 심상 파악에 유리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내가 지향하는 바를 완벽히 이상적으로 구현한 피아니스트가 그녀인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연주회에 갈 때면 난 항상 “우와!잘 친다”정도의 표현을 넘어선 어떤 이심전심을 느끼곤 한다.

 물론 내가 택하는 연역적인 방법은 약점도 있다. 이 방법은 연주하는 곡의 큰 그림이 파악되어야만 효과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전체가 파악되지 않거나 음악의 정서에 공감하기 어려울 경
우, 지엽적으로 변화가 심한 곡의 경우 의외로 (악보 기준으로)어렵지 않은 곡에서 손이 안 돌아가는 경우가 생긴다. 나에겐 쇼팽의 음악들이 그렇다. 쇼팽의 음악들은 큰 그림이 명확히 존재하지만 부분부분 정서적으로 변동이 심하기 때문에 큰 그림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이 테크닉이 딸린다고 느껴진다면, 내가 생각하기로는 연주력을 끌어올리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연역적인 방법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발상의 전환으로 누구나 멋지게 피아노 칠 수 있다
 뒤늦게 피아노 전공을 생각하는 사람, 전공자만큼 멋지게 치고 싶은 사람이라면 손 안 돌아간다고 고민하지 말자. 그리고 하농, 피쉬나만 죽어라 파다가 피아노가 꼴도 보기 싫어지는 상황은 만들지 말자. 테크닉 교재들의 효과를 부정하고 무시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테크닉을 잡고 곡을 쳐야 한다는 귀납적인 방법만 고집하지 말자는 얘기다. 거꾸로, 즉 큰 그림에서 세부적으로 들어가는 연역적인 방법이 훨씬 효과적일 수 있다. 고민할 시간에, 마음 가는 곡부터 한두 곡 고르고 피아노 앞에 앉자. 그리고 레스너를 찾아가 보자. 찾기가 귀찮다면 지금 이 글을 쓴 내게 다이렉트로 연락해도 된다!  내가 경험자이니 더 쉽게 도와줄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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