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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뮤지션 Oct 14. 2018

헨델로 들어왔다가 바흐로 나가다

첫인상은 헨델, 종착역은 바흐

https://youtu.be/rGt_Z_-LB6M

헨델:수상음악

존 엘리엇 가디너, 지휘

잉글리시 바로크 솔로이스츠



서로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두 거인
 각각 음악의 부모로 불리는 바흐와 헨델. 이 두 사람은 놀랍게도 동갑내기다. 그리고 태어난 곳(바흐는 아이제나흐, 헨델은 할레)도 그다지 멀지 않다(대략 200km정도 떨어져 있는데 당시에는 상당히 먼 거리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두 사람은 살아생전에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이 두 거물이 만나지 못했다는 건 아쉬운 일이다. 둘의 음악세계가 완전히 달랐던 만큼 그들이 만났더라면 분명 흥미로운 이야기거리가 넘쳐났을 테니.


완전히 다른 두 사람
 일단 두 사람은 성격부터 차이가 있었다. 바흐는 자기 인생에서 음악,신앙,가족밖에 모르는 바른생활 사나이의 전형이었으며, 철저한 장인정신으로 무장한 인물이었다. 반면 헨델은 시류를 읽는 눈이 빨랐으며 국제적으로 활동했고 좀 속물적인 출세욕도 있는 사람이었다. 영국이 너무 좋아 아예 영국으로 귀화했더니 자신이 하노버에서 모시던 선제후 조지 1세가 영국의 국왕으로 즉위하는 사태가 오자 재빨리 수상음악을 써서 위기를 모면했다는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처세술에도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독일 내에서 몇 번 옮겨다녔을 뿐 평생 교회와 궁정을 충성스럽게 지킨 바흐와는 대조되는 인생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성격은 음악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헨델이 보다 더 대중친화적이고 화려하고 멜로디 위주인 반면, 바흐는 학구적이고 치밀하고 빈틈이 없으며 계산적이다. 당연히 첫인상은 헨델이 훨씬 좋을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을 만나도 호탕한 웃음을 보여주는 호인 같다. 그러나 개인적인 체험으로는 거기까지뿐이었다. 정말 신들린 듯이 써냈다는 대작 오라토리오 “메시아”정도를 제외하면 영혼 깊은 곳에서 끌어올려지는 희열을 느끼기는 상당히 힘들다. 오히려 헨델의 좀 속물적이고 출세지향적인 인생을 반추해보면 약간의 거북함마저 느껴질 때가 있다.

결국엔 바흐로 간다
 이럴 때, 결국 눈길은 바흐로 향한다. 정말 학구적이고 치밀해서 헨델만큼의 친근감은 당장 느끼기 힘들다. 그러나 첫인상이란 것은 알고 보면 가슴이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머리, 그 중에서도 “게으른 머리”가 반응하는 것이다. 이것을 만드는 것이 심리학 용어로 도식이다. 미리 세팅되어 있는 정보를 받아들이는 틀(선입견)말이다. 이건 머리의 극히 게으른 작용이라 할 수 있다. 이 도식 따라 반응하면, 치밀하고 학구적인 바흐의 음악이 딱딱하게 인식될 수밖에 없다. 귀로 들어온 음악이 머리로 가지 않고 가슴으로 바로 가는 순간, 바흐는 놀라운 영감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나는 클래식 음악 애호가와 전공자를 모두 겪어보았기에 둘의 입장을 모두 잘 안다. 보통은 애호가의 시각과 전공자의 시각은 상당히 다른 부분이 많지만, 바흐의 음악은 둘 모두를 관통하는 공통분모가 있다. 바로 가슴으로 받아들이면 상황종료 된다는 것이다. 악기 전공자는 바흐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손이 자연스럽게 딸려 오는 초월적인 체험을 하게 되며, 애호가 역시 가슴이 바흐를 받아들이는 순간 모든 것이 제자리에 알아서 바로 놓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게 된다.

 또한 자극되는 부분이 다른 것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헨델은 외향적인 부분을 자극하지만, 바흐가 자극하는 부분은 전혀 다르다. 극히 치밀하게, 단 하나의 음도 허투루 쓰이는 것이 없도록 쓰여진 바흐의 음악은 질서가 잡힌 결과물이 주는 클리어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감성을 직접적으로 만지는 경우는 드물지만, 우리의 일상을 생각해 보자. 가끔은 온갖 감정의 찌꺼기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경우가 있다. 감정에 완전히 빠져 허우적거릴 때, 바흐만이 구사할 수 있는 질서정연함은 어지러운 무언가를 자동으로 정리정돈해버린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따뜻함을 잃지 않는다. 예를 들어 보자. 서양음악이 어느 순간 모두 불타 없어져도 평균율 48곡만 남아있으면 없어진 곡들을 모두 복원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이런 평균율이 주는 빈틈없고 체계적인 음의 진행들은 다이내믹이나 감정 따위의 표현 없이도 그 자체만으로 소름돋는 전율을 선사한다. 그런가 하면 G선상의 아리아,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칸타타 147번 등이 주는 그 말로 형언하지 못할 인간적인 따뜻함 또한 압도적이다.

 결론을 내자. 바흐만큼 인간의 진심을 자극하는 음악들은 없다. 속일 수 있는 감정의 조각들이 아니라 그 어느 누구도 속일 수 없는 진심의 정중앙을 파고 들어오는 것이다. 나의 경험이 말해 주는 걸 기준으로 언급해보면, 바흐가 잘 와닿지 않는 시기는 내 멘탈이 엉망이었을 때였다. 본래 멘탈이 엉망일수록 그 중심과 직면하기 어려운 법이다. 하지만 바흐는 우직하리만큼 진심의 중심만 노리고 침투하며, 다른 곳은 아예 타겟으로 잡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런 만큼 굉장히 직관적이기도 하다. 디테일이 극한까지 발휘되어 있으면서도 늘 큰 그림이 확고하기 때문이다. 보통은 큰 그림이 확고하면 세부를 놓치기 쉽고, 세부에 집착하다 보면 큰 그림이 실종되기 일쑤인데 바흐는 두 가지를 모두 잡아낸 인물이다. 그래서 음악의 아버지란 칭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비록 생전에는 헨델이 더 잘나갔을지언정 바흐가 훨씬 더 위대한 인물인 이유다. 어쨌든 난 그랬다. 헨델이란 문을 열고 들어와 바흐라는 문으로 나가게 됐다. 아니 바흐라는 문 앞에 자리 깔고 누워 있다는 게 더 적절하겠다!

https://youtu.be/1osi_pQcUdM

바흐:평균율 클라비어곡집 1,2권 전곡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피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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