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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뮤지션 Mar 09. 2020

예능의 경박함으로 얻은 클래식 대중화가 의미가 있는가?

멘델스존의 책임감 있는 바흐 알리기는 클래식 대중화의 모범답안

 얼마 전 모 예능 프로그램에서 손열음 씨가 출연해서 디지털 피아노로 연주한 블로도스 편곡의 모차르트 터키행진곡은 순식간에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 1위를 차지하는 등 크게 화제가 되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보고 머리 끝까지 화가 났다.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예술가를 이런 식으로밖에 대우하지 못하는가 하는 의문이 내 머릿속에서 끊이지 않았고, 손열음 씨가 조롱거리가 된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불과 며칠 뒤, 5월에 있을 손열음 씨의 리사이틀이 갑자기 전석매진이 떴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정황상 그 예능 프로그램의 강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손열음 씨가 출연한 예능 프로그램의 제작진을 맹비난했던 내가 머쓱해질 만도 했다. 어찌 됐든 티켓팅 파워가 올라가면 손열음 씨에게도 좋지 않은가? 

https://youtu.be/ZwVW1ttVhuQ

바흐 : 마태 수난곡

네덜란드 바흐 소사이어티

요스 판 벨트호펜, 지휘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 예능프로그램에서 손열음 씨라는 예술가를 잘못된 방식으로 소비했다는 것이 명백하다고 믿는다. 그러면 누군가는 나에게 질문할 것이다. “당신은 클래식 음악이라는 영역이 정녕 그들만의 리그가 되기를 원하는가?” 따위의 질문이 들어올 수 있다. 물론 아니다. 안 그래도 주위에 클래식 음악을 나만큼 즐기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클래식 음악이 대중화되어 나와 관심사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난다면 그걸 거부할 이유가 있겠는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의도는 좋았고 결과도 좋았으되 과정이 잘못된 부분을 짚고 넘어가고자 함이다.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해 중간 과정이 잘못되면 단기적인 성과는 나올 수 있어도 장기적으로 유지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꼭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일단 대중이 즐겨 보는 매스미디어의 성격과 클래식 음악의 성격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기본적으로 예술은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지만, 대중 혹은 군중들의 심리는 정신적으로 복잡하게 분열되면 분열될수록 좋다. 그 분열되고 정신없는 상태에서 빠른 시간 내에 강태공처럼 시선을 빠르고 강하게 낚아챌 수 있는 자극적인 뭔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대중문화다. 왜 기자들이 “기레기”라 불리며 욕이란 욕은 다 들어먹는가? 그들의 생리는 욕을 먹든 말든 조회수만 올리면 그만이다. 그래서 대중을 자극하는 헤드라인 뽑아내는 데 열을 올리고, 대중이 열광적으로 반응할(긍정적인 면이든 부정적인 면이든) 포인트를 잘 찾아내 “악마의 편집”을 가하는 데 고도로 발달되어 있다. 이러한 대중문화의 근본적인 성격은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집단으로 사고능력 자체를 저하시켜버린다. 괜히 TV를 바보상자라고 칭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근본적인 한계점이 있는 대중문화는 예술의 영역에 있는 그 뭔가와 본질적으로 완전히 녹아들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온갖 정신적인 집중력을 쥐어짜낸 끝에 만들어진 예술품이라는 결과물과 근본이 뭔지도 모를 천박한 것들이 잔뜩 섞인, 자극적이고 폭력적이고 경박하고 무지한 그 어떤 결과물을 단순 비교할 수 있는가? 이러한 것들이 가득 섞인 대중문화의 어떤 면이 “겉으로는” 보기 좋게 화면에 고도의 영상기법을 활용해서 등장하면, 웬만한 사람들은 그것이 진리인 양 믿게 될 수밖에 없다. 대중문화로 민중의 생각을 마비시켜버리는 정책은 독재자들이 엄청나게 많이 쓰는 방법이다. 그대로 일반적인 사람들은 바보가 되어버려 정치에는 아예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런 식으로 저급한 플랫폼을 활용해서 클래식 음악을 대중화시켜야 하는가? 좋은 대안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다. 일단 기본적으로 클래식 음악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제대로 전달하는 데 힘써야 한다. 좋은 예로 당대에 이미 100년 이상 지난 음악인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연주함으로써 전 유럽에 바흐 르네상스를 일으켰던 멘델스존의 행보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기록에 의하면, 멘델스존은 몇 년간 이 곡의 리허설에 매달렸을 만큼 공을 들였으며, 표값이 상당히 비쌌음에도 불구하고 공연 예매를 시작하자 불과 몇 시간만에 매진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연하게도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이 곡을 접해본 사람은 누구나 아는 바, 연주하는 건 고사하고 듣기에도 결코 만만한 곡이 아니다. 일단 무려 세 시간이 넘어가는 장대한 규모에 온갖 악곡의 형식이 다양하게 나오고, 심지어 당시에도 작곡된 지 100년이 넘은 생소한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대한 곡은 당대의 저명한 음악계 인사들은 물론이요, 대중들로부터 열광적인 호응을 이끌어냈고 이것을 기점으로 낭만주의 시대의 바흐 르네상스의 시발점이 되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바흐 마태수난곡은 대중들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극히 이해하기 어려운 곡이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멘델스존이 이 거대한 곡을 초연하기 위해 그만큼 공을 들였다는 이야기다. 즉, 자신의 음악 연구와 충실한 연습은 물론이고, 대중들에게 이 위대한 음악을 제대로 알리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멘델스존은 음악계에서 거의 유일무이한 금수저 출신이다. 당연히 멘델스존의 주위에는 사회를 선두에서 이끌어나가는 지도층들이 즐비했다. 그들과 교류하며 얻은 사회심리학적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멘델스존은 바흐 생존 당시 교회나 궁정에서만 연주되었던 바흐의 음악에서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었던 시민사회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니즈를 정확하게 파악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마태 수난곡도 상당 부분이 삭제된 채로 초연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교회나 궁정에서만 머물던 음악을 일반 시민 사회로 끌어오는 과정에서 불가피했던 측면이 있었다. 어찌 됐든 멘델스존은 바흐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100년 이상 지난 바흐의 음악이 당대 시민 사회에 호소할 수 있는 포인트들을 기막히게 찾아낸 셈이다. 마태 수난곡으로부터 시작된 바흐 열풍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각각 바흐협회가 만들어졌고, 바흐의 작품들이 온전한 형태로 출판되고 유통되었으며, 많은 작곡가들이 바흐의 작품들에서 영감을 얻어 걸작들을 줄줄이 남겼다. 당시만 해도 일부 음악인들만이 알고 있었을 뿐 대중들에게는 미지의 작곡가였던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가 멘델스존의 “하드캐리”에 힙입어 진정한 “음악의 아버지”로 발돋움했던 것이다. 설령 멘델스존의 작품이 단 한 곡도 남아있지 않더라도, 바흐를 이렇게 널리 알린 것만으로도 멘델스존은 영원히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다. 멘델스존은 워낙 부유했기 때문에 그저 자신과 그 주위 사람들끼리 그 음악을 어깨에 힘 빡 주고 즐기기만 했어도 욕할 사람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멘델스존은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했다. 그의 공헌으로 바흐가 수면 위로 올라왔고 대중에게 널리 보급될 수 있었으니까. 


 클래식 음악을 대중화하는 것은 중요하다. 비싼 개런티를 받고 세계 무대를 누비는 프로 연주자든, 동네 피아노 학원에서 아이들 레슨하는 사람이든 누구나 똑같이 그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 방법은 현재까지 살아남아 있는 예술성을 가진 작품을 전적으로 존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마땅하다. 클래식 음악이란 수많은 사조의 싸움 끝에 정반합의 결론으로 지금껏 살아남은 보석들이다. 당연히 그 본류가 무엇인지를 소상히 밝히고 대중화라는 작업에 들어가는 것이 맞다. 예능 프로그램의 경망스러운 방식으로 에술가가 “망가져가면서” 이루어지는 대중화는 본질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예술가의 자존심까지 짓밟는 소모적인 방식이다. 이 나라가 지금 군사독재 시절도 아니고, 이제는 정신문화를 선두에서 이끌어나갈 사람들도 많이 필요하다. 이 나라가 휘발성이 강한 자극적인 뭔가에 의해 움직이는 환경이 아닌, 보다 높은 수준의 정신문화에 의해 움직여가는 환경이 반드시 되어야 한다. 소위 말하는 “철학”이 단단한 나라는 결코 누구도 만만하게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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