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차 손열음 올드팬의 작심비판
https://tv.naver.com/v/12613355
일단, 나는 피아니스트 손열음 씨의 17년차 올드팬임을 밝혀 둔다. 이 오랜 시간 동안 연주회도 많이 가 보았고, 어떤 유명한 음악제의 예술감독이 된 그녀를 지근거리에서 보좌도 해보았으며(운전), 알게 모르게 상당히 많이 교류했다. 이러한 시간을 거치면서 그녀와 나는 나름의 친분이 쌓였고, 서로에게 어떤 신뢰감도 존재한다. 이러다 보니 어느 순간 그녀의 연주회를 보러 가는 행위는 유명인을 만난다는 설렘 대신 20년지기 친구를 만나러 가는 편안한 느낌으로 변했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를 언제나 절대적으로 지지해 왔다. 음악성은 물론이고 그녀 특유의 세계까지!
그런데 그녀가 어떤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나는 본래 TV를 잘 보지 않고 특히 예능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많기 때문에, 본방사수를 하지는 않았다. 단지 그냥 손열음 씨가 나온다니까 뒤늦게 다시보기로 봤다(손열음 씨가 나오지 않는 이상 볼 이유가 1도 없는 프로그램이었다!). 어쨌든 손열음 씨가 나온다는 이유로 그 동영상을 찾아서 보고, 얼마 안되어 나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은 분노를 느꼈다. 그랜드 피아노의 디자인만 가져온 디지털 피아노를 가져다 놓고 그녀에게 치라고 시킨다. 그녀는 손 풀 시간을 좀 달라고 요구한 뒤 스케일을 몇 번 쳐보고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칠 수가 없을 것 같은데”라고 말한다. 이 와중에 개그맨 유재석 씨는 히히덕거리며 감탄하고, 자막은 “손 푸는 클래스”따위의 어휘로 잔망스럽게 분위기를 몰고간다. 자막은 또 한 술 더 뜬다. 그녀가 디지털 피아노를 처음 만져 본다는 자막까지 띄운다. 대체 뭔가. 나는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기에 이 자막이 바로 이해가 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이것부터 나는 심지가 엄청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내가 17년을 지지해 온 세계적인 순수예술가를 어떻게 이런 식으로 희화화할 수가 있는가 싶었다. 손열음 씨의 표정은 분명 난감함 그 자체였다. 그래도 어찌됐든 그녀는 한 곡 뽑아 주었다. 볼로도스 편곡의 모차르트 터키행진곡으로. 이 곡이라면 그녀가 앵콜곡으로 수없이 연주했던 곡이다. 그런데 연주회에서 들은 그 엄청난 퀄리티는 고사하고 템포부터 현저히 느리다. 당연한 것이다. 애시당초 디지털 피아노로는 그 정도의 속주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 곡을 익히는 과정에서 세팅해 놓은 순간순간 변하는 터치들이 하나도 먹히지 않는다. 그렇게 피아노를 잘 치는 손열음 씨가 미스터치 안 내는 데만 집중하고 있음을 그냥 알 수 있었다. 전설의 카레이서 슈마허에게 최고속도 시속 150킬로를 넘기 어려운데다 코너링까지 불안한 경차를 주고 레이스를 하라는 것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
난 손열음 씨가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후 자괴감이 들지 않았을까 걱정이 된다. 순수예술가의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기 떄문이다. 이 예능 프로그램의 제작자들은 의도했든 그러지 않았든 상관없이, 예술가의 자존심을 짓뭉개는 행위를 한 것이다. 물론 피아노가 있는 곳이라면 구석에 박혀 있는 어떤 시골동네의 조율도 제대로 되지 않은 낡은 피아노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리히터 같은 사례도 있다. 그러나 이건 경우가 다른 문제다. 조율되지 않은 고물 피아노일지언정 일반 피아노는 터치하는 원리가 달라지지는 않고, 피아니스트의 연주와 해석에 따라 다른 소리를 내는 기능까지 사라진 건 아니다. 그리고 아무리 낡은 피아노도 조율만 제대로 하면 어느 정도는 쓸 만하다. 손열음 씨가 출연한 예능 프로그램의 경우는 화면상에 분명히 업라이트 피아노가 보였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출연하는 판에, 그 현장의 업라이트 피아노 조율하는 것조차 간과했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린가?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아예 디지털 피아노를 갖다 놓고 “신나는 곡으로 한 곡 해주세요” 라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손열음 씨의 등을 떠민다. 클래식 음악과 일반 피아노의 우월성을 주장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기본 중의 기본이다. 피아니스트를 대할 때는 피아니스트에게 맞게 대해야 하고, 화가를 대할 때는 화가에 맞게 대해야 하며, 의사를 대할 때는 의사에 맞게 대해야 하는 것이다.
진짜 제대로 된 연주를 첨부해보았다!!!!
그 동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 보아도, 손열음 씨의 난감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물론 그런 난감한 상황에서도 손열음 씨는 누구나 입이 떡 벌어질 만한 연주를 해 주었다. 다만 그녀 본인에게 만족스런 연주였을지, 피아노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들었을 때 감동이 오는지는 다른 문제다. 예술가의 본질은 영혼을 움직이는 것 아닌가. 깔깔 웃고 감탄사를 연발했을지언정 그 프로그램을 보고 영혼의 움직임이 있었는가는 따로 떼어서 생각해야 한다. 내가 아는 손열음 씨는 누구보다도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에 책임감을 가지고 노력하는 연주자다. 그러나 클래식 대중화가 본질을 외면하거나 간과한 전제로 되어서는 안 된다. 각설하고, 마음 같아서는 MBC의 그 프로그램 제작자들에게 서한을 보내 따지고 들고 싶은 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