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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뮤지션 Mar 11. 2020

인성 갑 하이든의 훈훈한 이야기들

하이든이 가슴으로 다가오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리라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클래식 음악 작곡가들 가운데 하이든을 가장 좋아하지 않는다. 하이든은 알고 보면 모차르트를 능가하는 다작의 작곡가이지만, 그 많은 작품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곡은 딱 한 곡, 만년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가 유일할 정도다. 그에 대한 나의 인상은 “직장인 감성”이다. 20년차 노련한 직장인의 처세술이 느껴지는, 뭔가 각잡혀 있으면서 은근히 능글맞은 느낌, 그러면서도 가슴 저 깊은 곳을 자극하는 페이소스가 부족하다는 것이 나의 하이든에 대한 인상이다. 이는 그의 생애가 정확하게 증명한다.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충실한 부하로서 근속 30년 이상을 채우고 대과 없이 정년퇴직을 했던 그의 생애는 모범적인 직장인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https://youtu.be/vfdZFduvh4w

하이든 : 교향곡 45번 f#단조 "고별"

다니엘 바렌보임, 지휘

빈 필하모닉


 이렇듯 음악적으로 봐서 (천지창조를 제외하고)하이든은 내 가슴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작곡가였던 적이 없다. 그러나 하이든을 논함에 있어서 그의 인성을 언급하기 시작하면, 그를 칭송할 수밖에 없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음악사적으로 하이든만큼 인성이 좋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 싶을 정도로 그의 인성은 남다른 면이 있다. 이는 수많은 훈훈하다 못해 감동적인 일화들이 증명한다. 음악을 너무 좋아한 영주가 궁정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을 휴가도 보내지 않고 풀타임으로 굴려 먹으니, 단원들이 한 명씩 슬금슬금 퇴장하는 퍼포먼스를 담은 “고별 교향곡”을 써서 연주하여 웃으면서 영주에게 전 단원의 휴가를 받아낸 젊은 시절의 일화는 시작에 불과하다. 그는 와이프가 자신이 방금 쓴 곡을 냄비 받침대로 쓰는 무식한 짓을 해도 그저 웃어 넘겼으며, 단원들 사이에서는 자상한 아버지이자 형님의 역할을 톡톡히 하며 “파파 하이든”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렇듯 에스테르하지 가에서 근면 성실한 태도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며 정년까지 채우고 퇴임한 하이든은 퇴임한 후 활동의 근거지를 영국으로 옮겼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멘토로서의 하이든의 따뜻한 인성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데, 자신의 뒤를 이어 나타난 후배들을 알뜰하게 챙기기 시작한 것이다. 일단 그는 아들뻘 되는 모차르트와 막역한 친구가 되었다. 이미 전 유럽에 명성이 자자했던 본인보다 모차르트가 훨씬 낫다는 말을 잊지 않았으며,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


신 앞에서, 그리고 정직한 인간으로서 말하는데, 당신의 아들은 지금까지 내가 직접 알거나 이름으로 아는 그 누구보다도 위대한 작곡가입니다. 그는 감각이 뛰어나고, 작곡에 대한 깊은 지식에 통달해 있습니다. 

 하이든의 이 강력한 지지 발언은 그동안 의견 차이로 소원해져 있던 모차르트 부자를 단번에 화해시킴과 동시에, 모차르트의 명성이 확고부동해지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이에 힘입은 모차르트는 자신의 역작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동서고금 전무후무한 성공의 반석 위에 올려놓고 돈방석 위에 올라앉았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의 함정이 있었으니, 일반 시민 계급은 모차르트가 오페라에서 구사한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지배층 풍자에 열광했지만, 지배층인 귀족들은 모차르트를 점점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기 시작했다. 이 여세를 몰아 작곡된 “돈 조반니”는 모차르트의 본거지 빈이 아닌 프라하에서 초연하여 피가로의 결혼에 이은 “연타석 만루홈런”을 쳤지만, 정작 빈에서 공연되었을 때는 빈의 귀족들이 모차르트에게 보낸 시선은 싸늘하기 짝이 없었고, 그들에게 모차르트라는 인물은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말았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한 번 하이든이 상황을 평정하는 발언을 날린다.


제가 이 논란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군요.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모차르트가 지금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가라는 점입니다.

 

https://youtu.be/BszM8qtAe08

 하이든 : 오라토리오 "천지창조"

 베를린 방송합창단

 베를린 필하모닉

 사이먼 래틀, 지휘


 하이든의 이 발언은 권위가 있어, 그 자리에서 설왕설래하는 분위기가 정리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렇게 모차르트를 살뜰히 챙기던 하이든은 모차르트가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자, 애정의 손길을 막 빈에 유학을 온 베토벤에게 돌렸다. 하이든은 베토벤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고 그가 머지않아 자신을 능가할 것임을 직감했다(어쩌면 자신보다 이미 나은 음악가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르겠다). 보통 알려져 있는 바로는 베토벤은 자신을 꼼꼼하게 지도해 주지 않는 하이든에게 불만을 느껴 1년 만에 사제관계가 끝났다고 알려져 있는데, 실상은 조금 다르다. 하이든은 음악적으로 베토벤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음악적인 것 대신 인생 선배로서의 처세술을 많이 알려주었으며, 빈 사교계에 베토벤을 적극적으로 알렸고 자신의 연주여행에 베토벤을 동행시킬 계획을 세우는 등 베토벤의 성장을 위해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베토벤은 하이든의 티칭 방식은 썩 맘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인생 선배로서 그를 깊이 존경했으며 베토벤이 작곡가로서 완전히 대성한 30대 중후반에 하이든의 “천지창조” 연주 현장에 직접 찾아가 감사를 표했다. 이렇듯 세상을 떠날 때까지 따스한 멘토를 자처한 좋은 인성을 가지고 살았던 하이든은 1809년, 77세를 일기로 빈을 점령한 프랑스의 나폴레옹군조차도 그의 집 주위에 알아서 경비를 서주는 극진한 존경을 받고 명예롭게 세상을 떠났다. 


 이렇듯 그는 조금 미련하게 보일 정도로 근면성실하기만 한 생애를 살았지만, 그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고 시류를 지혜롭게 읽으며 유능한 후배들이 지배층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뻗어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길을 닦아주었다. 그래서 하이든을 생각하면 참으로 다양한 감정이 든다. 음악은 너무나 재미없는데, 한 인간으로서는 고개가 숙여질 정도로 존경스러운 인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의 이러한 따뜻한 인성이 그의 음악을 좀 재미없게 만든 건지도 모르겠다. 한 마디로 음악이 너무 “착하다는”것이다. 마치 연애를 할 때는 나쁜 남자(여자)가 압도적으로 매력도가 높지만, 결혼하고 나면 그 반대가 무조건 행복한 것과도 같은 이치랄까. 하이든을 가슴으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날은, 내가 진정 행복하다고 선언할 수 있는 날일 것이다. 조금 억지스러운 결론이긴 하지만, 나의 행복의 기준점을 “하이든이 가슴으로 다가오는 때”로 설정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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