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와 봉준호 감독
코로나 바이러스의 마수가 전국으로 퍼져나가고 있던 와중에, 미국에서 낭보가 날아들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영화의 본산지 헐리우드를 배경으로 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관왕을 달성한 것이다. 나는 영화 보기를 그다지 즐기지 않아 이 영화도 보지는 못했지만, 이 큰 소식에 내용을 급히 살펴보았다. 사회의 양극화를 어느 편을 노골적으로 들지 않고 다양한 방법을 사용해서 입체적으로 그려낸 영화의 묵직한 메시지에 전세계가 공감한 것이었다. 이는 사회의 양극화라는 문제는 비단 대한민국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소환되는 인물이 있었다. 모차르트다.
나는 오래 전부터 모차르트의 다 폰테 3부작(피가로의 결혼, 돈 조반니, 코지 판 투테)과 마술피리를 들을 때면 음악이 주는 원래의 정서와 상관없이 뜨거운 눈물을 쏟은 적이 많았다. 사회의 변화를 누구보다 예민하게 읽고 그 격동의 세월을 음악이란 도구로 선두에 서서 이끌었던 모차르트의 외로운 고군분투가 피부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미 음악 기법에 관한 한 전세계에서 누구도 따를 자 없는 진정한 장인이었던 천재 모차르트는 시류를 정확하게 읽는 눈마저 갖춘 문자 그대로 “먼치킨”이었지만, 모차르트의 남다른 진보성을 당대의 세상은 품어내지 못했다. 막 약관이 된 모차르트는 어린 시절의 장기간 연주여행들을 뒤로 하고 고향 잘츠부르크에 갇혀 있었지만, 결국 그는 잘츠부르크의 콜로레도 대주교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이고 쫓겨났다. 그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빈에 정착했고 프리랜서 음악가로서 활동을 시작했고 자신의 천재성에 걸맞는 대우도 어느 정도 받았지만, 신분은 여전히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모차르트의 명성을 확고부동하게 만들어 준 작품이 그가 30세가 되던 해에 등장했다. 바로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이다.
모차르트 : 피가로의 결혼 K.492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지휘
빈 슈타츠오퍼
서른 줄에 접어들어 자신의 음악에 원숙함을 더해가던 모차르트 앞에 운명처럼 리브레토 작가 로렌초 다 폰테(1749~1838)가 나타났다. 다 폰테는 일찍부터 계몽주의 사상에 크게 경도되었고, 계몽 군주로 알려진 요제프 2세의 전속 시인으로 고용된 인물이었다. 모차르트와 다 폰테의 만남은 처음부터 척척 맞아들어가는 케미를 자랑했고, 그들은 바로 “피가로의 결혼” 작업에 들어갔다. 이들 콤비의 작업 속도는 실시간이라도 해도 좋을 만큼 대단히 신속해서, 착수 채 1년이 안되어 이 오페라는 완성을 보았다. 이 과정에서 이 두 사람은 프랑스의 작가 보마르셰의 원작의 내용에서 정치적으로 논란이 될 수 있는 부분들을 상당 부분 삭제하고 거기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사랑 이야기들에 포커스를 맞추는 등 검열의 화살을 지혜롭게 피해가는 장의력을 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원작이 품고 있는 당대 지배층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며. 주머니 속의 바늘처럼 여전히 충분히 날카롭고 예리했다. 모차르트는 다 폰테가 넘겨주는 대본을 바탕으로 등장인물들의 표면적인 성격뿐만 아니라 숨겨진 메시지까지 다면적이고 디테일하게 묘사했고, 등장하는 보컬들의 명인기가 들어나는 아리아보다는 긴박감이 넘치는 중창의 비중을 높여 계급 간의 갈등을 실감나게 표현해냈다. 그렇다고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계급투쟁 하나로만 몰아가지도 않았다. 주인공 피가로의 경우 이미 지배층에 있는 백작에 대항하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지만, 여주인공 수잔나와의 관계에서는 반대로 기득권층의 아이콘으로 묘사되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피가로의 결혼”은 1786년 5월 빈에서 초연되어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절반의 성공이라 함은 지배층들이 이 오페라에 보인 떨떠름한 반응을 감안한 것이다). 이후 프라하로 옮겨 치른 공연에서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모차르트는 문자 그대로 돈방석 위에 앉았다. 프라하의 시민들은 이 오페라가 품고 있는 날카로운 풍자들에 곧바로 반응했던 것이다. 모차르트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가 그것을 증명한다. “프라하 사람들은 온통 피가로의 결혼 이야기 뿐이라네”.
“피가로의 결혼”은 점점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던 일반 시민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고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준 작품이었다. 모차르트는 시민들의 영웅이 되었다. 반면 지배층들에게는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혔으며, 사실상 블랙리스트에 오른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쨌든 이 여세를 몰아 모차르트는 다 폰테와 합작으로 후속작 “돈 조반니”를 썼는데, 이 작품은 또다시 프라하에서 전대미문의 성공을 거뒀으나 빈에서는 지배층들의 조직적인 방해공작으로 거의 매장되다시피 했고 빈이란 지역사회에서 모차르트의 경제적 상황은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기생충”을 만든 봉준호 감독이 전 정권에서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던 사실과 소름돋게 오버랩되는 부분이다. 다만 봉준호 감독과 다른 점은 모차르트는 “피가로의 결혼”이라는 역작을 내놓은 뒤 지배층의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봉준호 감독은 자신의 이름이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과거를 딛고 “기생충”이라는 역작을 내놓았던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아카데미 4관왕에 오른 뒤 있었던 인터뷰에서 “이 영화가 전 세계적으로 자기 이야기 같다는 말을 많이 들어 마음이 좋지는 않다”고 말한 바 있다. 문화의 트렌드를 이끌어가는 예술가의 고뇌가 느껴지는 발언이다. 이러한 봉준호 감독의 고뇌에 찬 발언에서 또 연상되는 모차르트의 작품이 또 하나 있다. 피아노 협주곡 24번 c단조 k.491이다. “피가로의 결혼”의 작품번호가 492번인 것을 볼 때, 거의 동시에 쓴 곡임을 알 수 있다(실제로 그렇다). 이 곡에서 모차르트는 “피가로의 결혼”에서 나타나는 풍자를 목표로 한 능청스러울 정도의 위트는 흔적도 없이 제거해버리고, 듣는 이의 눈물샘을 강하게 자극하는 비장감을 전면에 내세워 놓았다. 증명된 바는 없지만 “피가로의 결혼”을 쓰면서 느낀 예술가로서의 뼈를 깎는 듯한 고뇌가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
모차르트 : 피아노 협주곡 24번 c단조 K.491
루돌프 부흐빈더, 피아노&지휘
빈 필하모닉
1786년의 모차르트와 2020년의 봉준호 감독의 운명은 시대만 달랐지 소름돋을 정도의 평행이론을 보여준다. 그리고 당대의 오스트리아와 2020년의 대한민국은 뭔가 큰 변화의 기로에 서있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모차르트는 세계가 인정하는 영웅이 되어 있다. 봉준호 감독도 250년 뒤에 가면 그런 평가를 받고 있지 않을까? 그런데 생각해볼수록 놀랍다. 거의 250년 전에 영화 “기생충”에 비견될 파급력을 가진 예술품이 음악계에서 나왔다는 것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