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열음 대변인과 함께 진짜 슈만을 만나러 가즈아~~~~
일단 나는 피아니스트 손열음 씨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서술을 하기가 어려움을 밝혀 둔다. 그녀가 10대 시절부터 나는 그녀의 충성도 높은 팬이었기 떄문이다. 그런데 올해 계획한 그녀의 전국투어 리사이틀을 앞두고 발매된 슈만 음반을 접해 보니 더더욱 객관적인 서술이 어려워진다. 내가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는 연주자와 작곡가가 겹친 것이다! 그러나 이 감흥을 또한 글로 남기지 않을 수 없어 일단 쓰는 바이다.
손열음 씨가 이번에 내놓은 슈만 앨범에는 슈만의 걸작 세 곡이 담겼다. 그것도 작품번호 16, 17, 18에 해당하는 크라이슬러리아나, 판타지, 아라베스크를 번호 순서대로 차곡차곡 담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연주자가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의 가장 좋아하는 곡들을 담은 것이다. 더욱이 그녀는 인터뷰 등을 통해 크라이슬러리아나와 판타지는 둘이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하는 곡들이라는 것을 반복해서 밝히곤 했다. 하지만 그녀가 이 곡들을 너무나 사랑해서 아낀 탓일까, 정작 무대에서는 이 곡들을 가지고 나오는 걸 볼 수 없었다. 다만 반 클라이번 콩쿨과 차이코프스키 콩쿨을 통해 그녀가 슈만에서 보여준 퍼포먼스는 기대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환상 소곡집”에서의 아기자기한 대화 같은 스토리 텔링과 “유모레스크”에서 보여준 신들린 번뜩임이라면!
슈만 : 판타지 C장조 op.17 1악장
손열음, 피아노
음반의 트랙은 판타지로부터 시작한다. 강렬하게 시작하는 첫 소절부터 손열음 씨는 듣는 이를 놀라게 한다. 그냥 단순히 강렬한 것이 아니라, 듣는 이의 가슴 한가운데를 한치의 오차도 없이 꿰뚫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인다. 연주가 진행되어가며 그녀는 저 구석에 숨겨져 있는 슈만의 내면적 이야기들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수면위로 끌어올려 노래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려는 듯 알토 성부의 한음 한음까지도 꼼꼼하게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이러한 디테일을 포장하고 있는 유려한 레가토는 이미 피아노의 테크닉으로 설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며, 곡에 대한 애정이 차고 넘침으로써 구현되는 영역이다. 또한 엄청난 표현의 콘트라스트가 트레이드마크인 소콜로프마저 울고갈 만큼의 발전부의 급격한 분위기전환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행진곡풍의 2악장에 가면 그녀 특유의 예리한 리듬감이 절창을 이룬다. 집요하게 진행되는 2악장의 붓점 리듬들은 치다 보면 갈길을 잃고 헤메기가 다반사인데(나도 대학원 졸업 연주곡으로 이 곡을 치면서 2악장에서 엄청나게 고생을 했다), 단 0.1초도 방향성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극악 난이도의 도약이 난무하는 코다는 또 어떠한가. 나는 이 부분에서 미스터치를 하나도 내지 않는 연주를 여태껏 폴리니를 제외하고는 들은 적이 없다. 그런데 손열음 씨는 미스터치를 하나도 내지 않을뿐더러 심지어 도약의 윗소리와 아랫소리를 모두 의미있게 살려낸다. 이 역시 곡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깊은 공감 없이는 구현할 수 없는 영역이다. 느린 템포의 아름다운 3악장 또한 적절하게 설정된 약간 다크한 빛깔의 톤으로 차분하지만 강한 에너지를 가지고 이끌어 가는 명연이며, 특기할 부분은 코다를 슈만이 원래 의도한 방식(1악장에 쓰였던 베토벤 “멀리 있는 연인에게”선율이 삽입된 원안)으로 연주했다는 점이다. 이 방식으로 연주한 음원은 극히 드물고, 나도 이 버전으로 녹음된 음원을 들어본 것은 안드라스 쉬프의 것 딱 하나다. 그런데 악보를 보면 1악장에 쓰인 것과 3악장에 쓰인 것은 베이스 화성의 진행이 조금씩 다르다. 그녀는 이 차이를 확실하게 느끼게끔 소리를 내 준다. 이로써 얻는 효과는 무시무시하다. 슈만이 이 대작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그 어떤 간절함을 이토록 절절하게 표현한 연주가 또 어디 있을까?
슈만 : 크라이슬러리아나 op.16 7번
손열음, 피아노
이어지는 크라이슬러리아나도 역시 그녀의 곡에 대한 깊은 애정이 완벽한 테크닉으로 구현되는 역대급 명연이다. 크라이슬러리아나는 온갖 감정들이 파편처럼 드러났다가 사라졌다가를 반복하는 판타지에 비해 보다 큰 틀에서 곡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난곡인데, 이것은 손열음 씨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장점과 절묘하게 시너지 효과를 낸다. 그녀는 본래 누구보다도 한 작품을 큰 그림으로 이해하는 데 능한 피아니스트이기 때문이다. 홀수 번호에 해당하는 플로레스탄 부분은 과감한 템포 설정과 강단있는 순간 순간의 표현력이 돋보이며, 짝수 번호에 해당하는 오이제비우스 부분은 반대로 재치있는 유연함과 서정성이 능글맞다고 느껴질 만큼 유려하게 표현되어 있어 단 한 순간도 지겨움을 느낄 새가 없다. 또한 앞에 수록된 판타지와 마찬가지로 큰 그림을 놓치지 않으면서 디테일한 변화들을 조금도 놓치지 않고 전부 충실하게 살려 준다. 이렇게 큰 틀과 세부를 모두 잡으면서, 그 위에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인 풍부한 스토리텔링을 아낌없이 풀어놓는다. 음반의 끝은 아라베스크가 장식하는데, 이 연주 또한 유려한 레가토가 돋보이는 너무나 아름답고 컬러풀한 연주다.
17년간을 그녀의 올드팬으로서 지켜본 바, 손열음 씨는 폭넓은 레퍼토리를 탄탄한 테크닉을 가지고 엄청난 독서량을 바탕으로 한 인문학적인 보편타당함으로 읽어내는 피아니스트였다. 어떠한 곡이든 설득력 있는 본인만의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이번 슈만 음반은 조금 다른 결이다. 그녀는 철저하게 슈만의 대변인이 되었고 슈만의 편에서 이야기한다. 이런 역대급 음반을 내놓으려고, 그녀는 이 곡들을 무대에도 잘 올리지 않고 묵혀 뒀던 것이었던가. 이제 다음 달이면 전국에 리사이틀을 통해 그녀가 그려 나가는 슈만이 봉인해제된다. 그녀가 보여줄 슈만의 강력한 설득력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오다가도 도망갈 것이라고 선포한다면 너무 사이비 교주같은 표현일까?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렇게 완벽히 슈만답게 연주한 슈만은 앞으로도 접하기 어려울 것이며, 손열음 이상 가는 슈만의 대변인은 전세계 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우리라. 자, 이제 진짜 슈만을 만나러 가자. 손열음이라는 완벽한 통역을 대동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