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예권, 김규연, 문지영, 윤아인 - 진지한 음악성으로 승부하다
전문 연주자로서 활동하는 피아니스트들은 누구나 존경받을 가치가 있다. 각자 그 자리에 올라오기까지 전력투구해왔던 것만으로도 말이다. 그런데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를 접하면서 누구나 그렇듯 호불호가 생긴다. 지금껏 나를 특히 감동시킨 연주자들을 차례차례 떠올려 보았다. 이미 20년 가까이 충성팬을 자처해 온 손열음부터 시작해서, 리히터, 아라우, 브렌델, 켐프, 폴리니, 부흐빈더, 길렐스, 조성진, 부닌, 쉬프 등등. 그런데 방금 열거한 피아니스트들은 물론 각기 확고한 개성이 있지만 어느정도의 공통분모도 있다. 저 중엔 물론 테크니션의 이미지로 기억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깊은 음악성과 음악에 대한 학구적인 자세로 승부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 나는 예전부터 음악성이 높은 피아니스트를 유독 좋아해왔다. 반면 (눈으로 보이는 것 기준으로) 외적인 퍼포먼스가 화려한 연주자는 한 번씩 피로감이 적잖이 느껴질 때가 있다.
브람스 : 피아노 소나타 3번 f단조 op.5
선우예권, 피아노
이런 관점에서 나는 이 지면을 빌어 진지한 음악성으로 음악을 만들어 나가는 네 명의 연주자를 글로써 소개해고자 한다. 이들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알지만, 개인적으로 좀더 알려졌으면 하는 강한 바램이 있는 피아니스트들이다. 주인공은 2017년 반 클라이번 콩쿨 챔피언 선우예권, 최근에 서울대 교수로 임용된 김규연, 부조니 콩쿨 챔피언 문지영, 최근에 유투브채널 “또모”를 통해 널리 알려진 러시아 차이코프스키 음악원 박사과정 중에 있는 윤아인이 그들이다. 먼저 선우예권부터 살펴보자. 그가 반 클라이번 콩쿨에서 우승을 할 때 나이는 거의 서른이 다 되어서였다. 보통 메이저 콩쿨의 순위권에 입상하는 피아니스트들은 20대 초반이 가장 많고, 많아 봤자 20대 중반이다. 그런데 서른이 거의 다 된 나이에 반 클라이번 우승을 차지했다는 것은 대기만성형이란 이야기다. 이러한 것들이 도리어 음악적인 내공을 쌓는 데는 좋은 약이 되었다. 여기에 그는 스승 복이 많았다. 미국 유학 시절 세이무어 립킨과 베토벤 해석으로 유명한 리처드 구드를 사사했고, 학업의 터를 독일로 옮겨서는 역시 학구파로 유명한 베른트 쾨츠케를 사사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선우예권의 연주에는 그 나이에 걸맞지 않은 묵직한 내공이 녹아 있다. 테크니션들의 놀이터라고 일컬어지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그의 연주로 들어보면, 그는 벤츠 s클래스와 같은 대형 세단을 능숙하게 운전하는 데 비유할 수 있을 정도로(페라리 같은 슈퍼카의 쾌속질주 느낌과는 결이 다르다) 깊이 있는 원숙함을 느낄 수 있다. 베토벤을 연주하든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하든 슈만을 연주하든 그의 연주에서는 언제나 높은 품격이 느껴지며, 다 듣고 나면 음악적인 만족도가 대단히 높다. 반 클라이번 콩쿨 우승 이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졌지만, 더 많이 알려졌으면 하는 피아니스트다.
슈베르트 : 악흥의 순간 전곡
김규연, 피아노
김규연은 “한국 피아노계의 대모”로 일컬어지는 이경숙 교수의 딸이며, 최근에 서울대 교수로 임용된 피아니스트이다. 85년생으로 올해 나이 35세이며, 화려하지는 않지만 꾸준한 음악활동을 계속해왔다. 그녀 역시 학구적이고 진지한 깊이를 갖추고 있는 연주자다. 일단 그녀의 연주를 들어보면 흐름이 매우 자연스럽고 따뜻한 톤을 가지고 있으며 악보에 철저히 충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말로 표현하기는 쉽지만 사실은 가장 어려운 덕목이다. 그런데 실제로 라이브를 보면 알겠지만, 그녀는 외적으로 화려한 퍼포먼스를 펼칠 생각이 없어 보여 비주얼적으로는 조금 투박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 연주의 매력이다. 외적인 화려함이 없는 대신 그녀는 어떤 곡을 연주하든 내적으로 엄청나게 많은 아이디어들을 꽉꽉 채워놓고 그것을 물 흐르는 듯한 자연스러운 흐름 안에 녹여낸다. 그녀의 어머니 이경숙 교수는 인터뷰에서 “우리 딸은 꼭 베토벤이나 브람스만 치려고 한다”고 말한 바 있는데, 여기서 그녀의 음악을 대하는 진지한 자세를 유추해낼 수 있다. 비록 스타급 피아니스트들보다 인지도는 다소 떨어지는 감이 있지만, 그녀의 연주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누구나 그녀의 진실된 연주에 감동하는, “볼매”형 피아니스트다.
슈만 : 판타지 C장조 op.17
문지영, 피아노
이어서 소개할 문지영은 2014년 제네바 콩쿨과 2015년 부조니 콩쿨을 연달아 재패한 실력파 피아니스트이다. 그런데 그녀가 부조니 콩쿨 챔피언이 되던 해에 조성진이 쇼팽 콩쿨에서 우승하는 메가톤급 소식이 전해지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이 엄청난 업적이 묻혀 버린 감이 있다. 그러나 문지영은 조성진의 인기에 묻혀질 피아니스트가 절대 아니라는 것을 꼭 짚고 넘어가고 싶다. 특히 그녀는 슈만에 엄청나게 강한 피아니스트이며, 실제로도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작곡가는 슈만이라고 밝힌 바 있다. 또한 그녀는 부조니 콩쿨 우승 당시 결선에서 깊은 음악성이 요구되는 난곡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을 연주했는데, 이것만으로도 그녀의 음악성은 보증수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려하고 탄탄한 테크닉을 (당연히)가지고 있지만 그녀는 이것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언제나 음악 그 자체에 집중하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어 듣는 이에게 깊은 감동을 남긴다.
라흐마니노프 : 악흥의 순간 4번 e단조
윤아인, 피아노
마지막으로, 최근 들어 유투브 채널 “또모”에 출연한 윤아인을 꼭 주목할 것을 강력히 주문하고 싶다. 그녀는 올해 나이 22세의 젊은 피아니스트로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음악원의 박사 과정 중에 있으며, 명 교수 엘리소 비르살리제를 사사하고 있다. 또모에 출연한 그녀의 연주력은 놀라웠으며, 더 놀라운 점은 22세에 불과한 어린 그녀가 음악을 보는 시각은 천리안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폭넓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녀의 연주 영상을 유투브에서 찾아보았으나, 가짓수가 많지는 않았다. 이는 국내에는 아직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는 이야기다. 아마도 주 활동 무대가 러시아이기 때문에 나오는 현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완벽한 테크닉 아래 만들어지는 음악은 굉장히 진실되고 따뜻하며 모든 음에 각기 다른 컬러의 의미부여가 되어 있어, 문학적인 스토리텔링을 느낄 수 있다. 그녀는 “기교파보다 진실되게 음악을 대하는 연주자로 불리고 싶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는데, 이는 그녀의 음악관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발언이다. 개인적으로 그녀에게 크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가장 어려운 곡 세 곡을 물어보는 또모 제작진의 질문에 첫 번째로 들고 나온 곡이 모차르트 “작은별 변주곡”이었다는 점이다. 그녀는 이 곡을 가리켜 “왜 못 치는지를 몰라서 어려운 곡”이라고 말했으며, “오늘 모차르트가 괜찮았다고 생각했으면 못 친 것이다”라고도 말했다. 이것은 모차르트가 전문 연주자들에게 다가오는 어려움의 핵심을 짚은 발언이다. 이러한 그녀의 발언에서 음악을 정말 진지하게, 진심으로 접근한다는 것이 강하게 느껴진다. 그녀의 앞으로의 행보가 어떻게 될 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다만 이렇게 진지한 음악성을 갖춘 젊은 피아니스트를 또 한 명 인지하게 되었다는 것이 너무나 흐뭇할 뿐이다.
이 작은 나라 대한민국 땅에서 언젠가부터 걸출한 피아니스트가 대거 배출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흐름이 농익은 상태가 되니 또 아주 다양한 스타일의 피아니스트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 또한 매우 고무적이다. 그 중에서 나는 깊은 음악성으로 무장한 피아니스트들을 특히 더 주의깊게 보게 된다. 선우예권, 김규연, 문지영, 윤아인은 그런 면에서 내 눈과 귀를 행복하게 해주는 보물같은 피아니스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