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윤아인은 내 귀에 강도처럼 침투했다
동갑내기인 슈만과 쇼팽은 낭만주의 시대를 함께 이끌고 간 인물들이다. 그들의 만남은 처음부터 극적이었다. 쇼팽의 “돈 조반니 변주곡”을 접한 슈만은 극도로 흥분하여 자신이 만든 음악평론지 “음악신보”에 “천재가 나타났다, 모두 모자를 벗으라!”고 썼으며, 그 떄까지 사교계에서나 알려져 있던 쇼팽의 작품들을 독일 전역에 힘써 보급했다. 폴란드 출신인 쇼팽이 서유럽 쪽으로 처음 진출했던 건 리스트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지만, 그의 작품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슈만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이들 두 사람은 각자의 걸작을 한 곡씩 써서 서로에게 헌정했는데, 슈만은 대규모의 역작 “크라이슬러리아나”를 쇼팽에게 건넸고, 쇼팽은 답례로 발라드 2번을 슈만에게 건네줬다. 슈만의 쇼팽에 대한 애정은 남달라서, 자신의 작품 “카니발”에 쇼팽을 등장인물로 등장시키면서 쇼팽풍의 음악을 써서 삽입하기도 했다. 이러한 슈만의 과도할 정도의 애정에 쇼팽은 다소 부담스러워하기도 했지만, 어찌됐건 쇼팽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데는 슈만의 공헌이 결정적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슈만이 쇼팽을 처음 보고 느꼈던 그 경이로움을 나는 최근에 정확하게 그대로 느꼈다. 바로 피아니스트 윤아인을 통해서다. 평소에 항상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로 망설임 없이 슈만을 꼽는 나는 음악적인 가치관도 슈만의 그것과 비슷한 면이 많다. 일단 슈만은 피상적이고 눈에 보이는 기교만 중시하는 음악과 음악인들을 극도로 혐오했고, 음악 자체의 진정성을 극한까지 추구하여 가상의 단체 다비드 동맹을 만들었다. 그 멤버에는 연인 클라라, 베를리오즈, 쇼팽, 그리고 이미 세상을 떠났던 베토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나에게도 내 마음 속의 다비드 동맹에 들어 있는 멤버들이 몇 있다. 자격은 나와 음악적인 가치관을 공유하는 이라면 남녀노소 직업 불문이다. 그리고 윤아인이란 피아니스트는 처음 접하는 순간, 나의 다비드 동맹원에 즉각적으로 스카웃되어졌다!
유투브 채널 “또모”를 통해 차이코프스키 음악원 동문인 드미트리 쉬스킨과 함께 등장한 윤아인은 첫 등장부터 나에게 핵폭탄급 충격을 안겼다. 슈만의 눈으로 보자면 윤아인은 쇼팽에 해당하고 쉬스킨은 리스트에 해당했다. 쉬스킨은 눈이 휘둥그래지는 엄청난 테크니션이었으나, 개인적으로는 가슴을 울리는 깊은 페이소스는 조금 부족함이 느껴졌다. 쉬스킨의 이러한 부족한 면은 윤아인이 넘치도록 채우고 있었다. 음 하나하나에 아이디어가 살아 있고 음악을 대하는 진정성과 아기자기한 스토리 텔링이 있었다. 그녀는 또모를 통해 여러 곡을 들려 주었는데, 또모 채널의 포커스는 라흐마니노프 악흥의 순간 4번, 리스트 타란텔라, 스페인 랩소디 같은 기교적이고 화려한 곡에 쏠려 있는 느낌이었지만 내 눈을 잡아끈 건 그녀가 자신의 가장 어려운 곡 3곡 중 한 곡으로 지목한 모차르트 작은별 변주곡을 비롯해, 피아노 소나타 B플랫장조 K.333, 쇼팽 왈츠 f단조 등 단아하고 심플한 곡들이었다. 이 곡들이 어떤 곡들인가. 동네 피아노 학원에서 초등학생들이 뚱땅거리면서 치는 장면을 수도 없이 볼 수 있는, 기초적인 곡으로 인식되어 있는 곡들이다! 그런고로 나도 이러한 곡들은 남들 앞에서 나와서 치는 것이 좀 꺼려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윤아인은 또모가 마련한 음대생들과의 배틀 판에서 음대생들이 들고 나오는 화려하고 기교적인 곡들을 위에 언급한 저 단아하고 심플한 곡들로 간단히 제압해버린다. 간단하고 심플한 음악들로부터 가슴 저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감동을 체험하는 건 절대로 흔하게 경험할 수 있는 바가 아니며, 연주자의 입장에서도 주어진 정보량 자체가 많지 않은 판에서 감동을 이끌어내는 것 또한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너무도 어려운 과제다. 월드컵이나 챔피언스리그 같은 큰 축구 게임에서, 대부분의 관중들은 화려한 드리블로 상대 수비를 몇 명씩 제쳐가며 골을 넣는 선수를 보고 열광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정말 뛰어난 공격수는 볼터치 단 한두 번으로 수비수들을 농락하거나 순간적으로 공이 오는 위치에 기가 막히게 자리를 잡고 간단하게 골을 넣는다. 축구 좀 본다는 팬들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바, 후자의 선수가 사실은 더 뛰어난 선수다. 흔히 이런 선수를 두고 “축구 도사”라고 칭하는데, 윤아인이 축구선수로 치자면 후자에 해당하는 피아니스트였다. 즉, 내 눈에 비친 그녀는 피아노 도사요 음악의 현자였던 것이다.
이렇게 윤아인이라는 대한민국 국적의 젊은 여성 피아니스트는 나의 귀에 강도처럼 침투해서 내 가슴 한가운데를 초토화시켜(?) 놓았다. 슈만이 쇼팽을 처음 봤을 때의 그 흥분감이 능히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그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난 테크닉을 지녔지만 결코 그것이 주는 함정에 매몰되지 않고, 음악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짙게 느껴지는 진정성 있는 피아니스트 윤아인은 분명 내게 신내림을 받은 듯한 영감으로 다가오고 있다. 17년 전에 인지했던 손열음의 존재가 아직 내 갈 길을 찾지 못해 빌빌대던 나를 음악의 길로 인도했던 의미가 있다면, 2020년의 나의 눈과 귀앞에 등장한 윤아인의 막강한 존재감은 음악의 길을 걸어가는 나에게 음악성의 눈을 뜨게 하는 결정적인 터닝포인트가 되리라 믿는다. 마치 쇼팽을 접하고 흥분에 휩싸인 슈만이 러닝타임 30분이 넘어가는 거대한 규모의 역작 “크라이슬러리아나”(쇼팽에게 헌정된 작품)를 단 4일 만에 써제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