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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뮤지션 Mar 26. 2020

친숙한 거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지리산 같은 그의 피아니즘

https://youtu.be/lncNcNtGkJY

슈베르트 : 피아노 소나타 B플랫장조 D.960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피아노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는 사람들은 모를 수가 없는 이름 중 하나가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다. 그의 이름은 진부한 표현이지만 전설이다. 구소련 시절을 포함해서 지금까지도 전설적인 피아니스트들이 끝을 모르고 배출되는 러시아에서조차 언터처블 왕중왕을 놓치지 않는 진정한 거인 중에 거인, 각기 다른 곡을 넣은 프로그램으로 무려 80개의 프로그램을 짤 수 있었다는 엄청나게 넓은 레퍼토리, 천둥이 치는 듯한 폭발적인 타건과 블랙홀 같은 흡입력…그를 수식하는 표현은 다 찾아보자면 밤을 세워야겠다 싶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다. 여기에 베일에 쌓여 있던 그의 사생활은 온갖 “카더라 통신”을 생산하며 신비한 아우라까지 풍긴다(비교적 최근에 나온 브뤼노 몽생종의 리히터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하여 여기에 잘못된 정보가 많았음이 드러나긴 했지만). 


 나에게도 당연히 리히터는 특별히 거대한 존재다. 그런데 내 한정으로 친구처럼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일단 그의 인생에서 아마추어로 지낸 기간이 길었다는 점이, 이 거인에게 접근하는 장벽을 대폭 낮춰준다. 그는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였던 아버지를 둔 음악적인 환경에서 성장했지만, 정작 아버지는 리히터가 어린 시절 피아노에 대해 기본적인 것만 알려 주었다. 그 외에는 온전히 독학으로 피아노를 공부하며 클럽에서 반주를 하거나 오페라 연습 때 반주를 해주는 것이 전부였다. 이러한 생활을 22세 때까지 하다가, 그는 러시아의 전설적인 피아노 교사인 하인리히 네이가우스와 인연이 닿게 되어 그 문하로 들어가게 된다. 이 때 네이가우스는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쇼팽 발라드 4번을 완벽하게 연주해내는 리히터를 보고 넋이 나갔다고 한다. 네이가우스는 클럽과 오페라극장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후의 유연한 감성이 녹아있는 리히터의 개성을 교정하려 하지 않고 그대로 살려 장점으로 승화될 수 있게끔 도와 주었다. 이렇게 그는 클럽에서 낡은 피아노나 치는 거친 반주자에서 탈피해 구소련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성장했다. 그러나 젊은 시절의 그는 서방세계에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다만 소문은 무성하게 퍼져 나갔다. 거기에 기름을 부은 사건이 하나 있었으니, 서방세계에 먼저 이름을 알린 리히터의 절친 에밀 길렐스가 어느 연주회에서 박수 갈채를 받고 청중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저에게 많은 칭찬을 해 주셔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 산 너머 저의 조국에는 저의 친구 리히터라는 피아니스트가 있습니다. 그의 연주는 저보다 천 배는 낫습니다!


 결국 리히터는 미국의 카네기 홀에 데뷔하게 되고, 미국의 청중들은 길렐스의 저 말이 결코 과정이 아니었음을 직접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술집에서 피아노를 치며 독학으로 공부해온 피아니스트가 세계 정상에 우뚝 서는 순간이었다.



 내가 리히터를 친근하게 느끼는 이유는 바로 아마추어로부터 출발해 늦은 나이에 본격적으로 전문적인 훈련을 받아 세계 최고가 됐다는 그의 행보 때문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러한 면이 내가 피아노 전공의 길에 들어서기 전에는 리히터라는 인물을 주제 넘게 과소평가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 전의 내 귀에는 리히터의 연주는 테크닉이 뛰어나고 음악성까지도 뛰어나지만, 컬러풀한 세련됨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으로 들렸다. 그러나 이건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본 것이었다. 물론 앞서 언급한 그 느낌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리히터의 연주에는 그것을 티클만큼의 약점으로도 여기지 않게 되는 무시무시한 흡입력과 힘이 있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여기에 전공 시작 후 나에게 피아노를 가르친 두 분의 선생님들이 “너는 리히터와 유사한 스타일”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 때마다 나는 “리히터가 보드카를 깡으로 열 병쯤 원샷하고 치면 저랑 비슷하게 치지 않을까요?”라는 농담을 하면서 웃어넘기기는 했지만, 두 선생님의 “리히터 소환”은 나에게 큰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아닌 게 아니라 리히터의 손을 보면 손가락이 굵은 것이 나와 구조가 비슷해 보인다. 단지 내 손이 리히터만큼 크지 않을 뿐이다(그래서 힘들 때가 많기는 하다). 보통 손가락이 굵으면 피아노를 칠 때 소리도 상당히 선 굵은 소리가 난다. 그래서일까? 나는 좁은 레인지에서 손가락이 잽싸고 정밀하게 돌아가야 하는, 소위 말하는 “클로징 포지션”이 많은 곡들을 힘들어할 때가 많다. 물론 리히터는 크기 자체가 큰 데다 굵은 손가락을 가지고도 클로징 포지션이 많은 곡들을 기가 막히게 세밀하고도 힘있게 쳐낸다. 예를 들어 극악의 클로징 포지션에 수많은 임시표가 난사되어 있는 쇼팽 연습곡 op.10-4는 솔직히 말하면 나에게는 때려죽여도 치고 싶지 않은 곡이다. 그런데 유투브에서 “리히터의 미친 속주”로 회자되고 있는 그의 연주를 보면, 비정상적일 정도의 무시무시하게 빠른 템포로 그 곡을 치는데 뭉개지는 음이 단 하나도 없다. 물론 앞서 언급했듯이 컬러풀한 세련미는 조금 덜하다. 그러나 소름이 끼칠 정도로 터치가 세밀하고 음악적인 큰 그림이 확고해서 이것이 전혀 약점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그는 음 하나하나에 스토리 텔링을 부여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작곡가와 곡의 성격에 맞게 큰 그림을 단단하게 그려놓은 다음 그것을 목표로 힘있게 죽죽 밀고나가는 스타일이다. 그렇기에 그의 음악은 호흡이 매우 길고 끌고 나가는 힘이 강한데, 이것이 바로 그의 음악이 가지는 가공할 흡입력의 열쇠다. 리히터는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으면서 세상 천지에 못 치는 곡이 없다. 바흐도, 베토벤도, 슈베르트도, 슈만도, 쇼팽도, 브람스도, 라흐마니노프도, 프로코피에프도 그의 손길을 거치면 그냥 믿고 들으면 된다. 

https://youtu.be/yEU1noNlnCU

 베토벤 : 피아노 소나타 30,31,32번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피아노


 내게 리히터라는 인물은 거대한 산이다. 그러나 험준하지는 않고, 마음만 먹으면 바로 올라갈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친근한 산 같기도 하다. 거대한 산들 가운데, 규모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올라가기 쉬운 산들도 있다. 하나 콕 짚자면 지리산에 비유할 수도 있겠다. 지리산은 높이도 높고 규모도 거대한 산이지만 설악산, 소백산, 월악산, 치악산 등 지리산보다 낮으면서 등반 난이도가 높은 산보다는 난이도가 낮은 편이다. 그리고 지리산은 둘레길이 잘 조성되어 있어 편하게 그 길을 걸으며 지리산의 웅혼함을 느끼기에도 충분하다. 지금 이 순간 생각난 것이 있다. 아직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것인데, 휴대폰에 리히터의 음원들을 가득 넣어놓고 이어폰으로 들으면서 지리산 둘레길을 천천히 걸어보는 것이다. 매우 감동적인 순간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주말이 되면 차의 시동을 켜고 떠나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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