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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뮤지션 Apr 08. 2020

익숙해진 혁명, 베토벤 발트슈타인

그러나 우리에겐 아직 마주해야 할 혁명이 많다

 잠시 음대의 실기시험 현장에 있는 음대 교수들의 입장이 되어보자. 그들의 입장에서 정말 듣고 싶지 않은 곡들이 두 곡 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1번 C장조 op.53 “발트슈타인”의 1악장과 쇼팽의 연습곡 op.10-4 “추격”이다. 입시 실기시험에 임하는 학생들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이 두 곡을 거의 올인하다시피 파고들며 레슨 선생님의 불호을 감내해 왔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베토벤 발트(이하 발트라고 표기)와 쇼팽 추격은 입시가 끝나는 동시에 평생 쳐다보기도 싫은 애증의 곡들이 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이런 상황에서 웃지 못할 상황도 벌어진다. 피아노 학원이나 연습실에서 같이 입시를 준비하는 친구 간이나 그곳을 드나드는 일반 수강생들까지도 이 곡들은 아예 들은 것만으로 외워버릴 정도가 될 때가 다반사다.

https://youtu.be/I-OM70p3Jd0

 베토벤 : 피아노 소나타 21번 C장조 op.53 "발트슈타인"

 마우리치오 폴리니, 피아노


 그런데 베토벤 발트는 “입시생들의 애환이 녹아 있는 곡”이란 이미지로 묻히기엔 너무나 혁명적인 작품이라는 것을 반드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일단 이 작품은 작품성 자체도 굉장히 뛰어나지만 소위 말하는 타이밍이 너무나 잘 맞아떨어진, 운도 타고난 작품이기도 하다. 베토벤 발트의 작품번호가 그것을 말해준다. 작품번호 53번. 어마어마한 퀄리티의 걸작들이 줄줄이 사탕으로 쏟아지던 베토벤 생애 중반부의 “명곡의 숲” 한가운데에 위치하는 작품이다. 거기에 이 때는 에라르 사라는 악기회사에서 출시된, 표현의 레인지가 대폭 확충된 신형 피아노가 베토벤에게 전달된 시기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신형 피아노의 혁신적인 기능을 마음껏 시험해 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셈이다. 여기에 베토벤은 이미 전작인 op.31로 묶여 있는 세 곡의 피아노 소나타에서 각기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품을 써내며 자신의 “플랜 A”를 반영하는 청사진을 완벽하게 세팅해 놓은 상태였다. 비록 베토벤에게는 결정적인 장애요소(하루가 멀다 하고 먹어가는 귀)도 있었지만 중기 특유의 그의 창작열기가 그것을 가볍게 제압했으며, 신형 피아노도 도착했고 피아노 음악 작곡을 위한 확실한 “빅 데이터”까지 차곡차곡 채워져 있었기에, 이 모든 “포텐”이 발트를 통해서 제대로 폭발해버린 것이다.


 발트 소나타는 첫 악장의 주제부터 대단히 혁명적이다. 그 이전의 소나타 형식으로 된 작품들에서는 주제는 어찌됐건 단일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전개 방식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변화를 주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베토벤은 이 작품에서 한 주제 안에서 대단히 넓은 음역과 냉온을 오가는 극단적인 다이내믹의 낙차를 구사한다.  2주제는 어떠한가. 1주제의 낙차 큰 파괴력과는 달리 3도 관계의 키를 쓰면서 멋진 대조적인 효과를 내며(두 주제의 콘트라스트를 3도 관계로 주는 것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것으로, 소나타 형식에서 보통은 4,5도 관계의 대조를 많이 쓴다), 두터운 화성을 가지고 유려한 레가토를 구사하며 신형 피아노의 레가토 기능을 극대화한다. 놀라운 점은 이러한 혁명적인 기법들이 엄격한 소나타 알레그로 형식의 폼 안에서 극단적이랄 만큼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가히 “질서 속의 자유”의 끝판왕이라 할 만하다. 한편, 이 작품은 3악장 구성으로 봐야 하는지 2악장 구성으로 봐야 하는지 약간의 논란이 있는데, 나는 2악장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2악장 아다지오 모데라토가 3악장의 서주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악상 지시어 앞에 “인트로”라는 단어가 있다!). 이 두 번째 악장(3악장)이야말로 1악장보다 한 술 더 뜨는 진정한 혁명의 현장이다. 조용하게 돌아가는 오른손의 아르페지오 오스티나토를 축으로 두고 왼손으로 연주하는 주제가 저음역과 고음역을 양손 크로스로 넘나들며 산중의 메아리 같은 효과를 내는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한 프레이즈의 왼손 첫음이다. 이 첫음은 페달 효과를 이용해 한 프레이즈 내내 울리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페달의 사용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베토벤은 실험적으로 증명한 것이다. 또한 이것이 빌드업되면서 포르티시모로 변하며 고음역이 주제를 제시하는 아래에 공격적인 트릴이 삽입되고, 왼손은 무시무시한 에너지를 품은 빠른 상하행 스케일이 받쳐준다. 고도의 테크닉이 요구되는 부분이자 엄청난 연주효과가 과시되는 대목이다. 이렇게 한바탕 멋진 빌드업을 해치운 음악은 이후로 온갖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가득한 여러 가지 패시지위크로 전개되어 가면서 론도 형식을 이루며, 프레스티시모의 무식하게 빠른 템포를 장착한 코다에 가서는 옥타브 글리산도까지 구사하며 역동적인 운동감을 한껏 시전해준다. 이 정도면 정말 음악적 혁명의 끝을 보는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안타까운 점은, 입시곡의 이미지가 너무 강한 1악장이 장애물로 작용한 것인지 론도 악장(2악장이냐 3악장이냐의 혼선을 막기 위해 론도 악장으로 지칭한다)을 다루는 전공생들은 정말 드물게만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프로 연주자들의 리사이틀에서는 쉽게 볼 수 있지만 말이다. 확신에 차서 말하건데, 이 작품은 반드시 전악장을 공부해야지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익숙해져버린” 감이 있지만 이 작품은 베토벤표 음악혁명의 아이콘과도 같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전악장을 공부해 보면 분명 놀라게 될 것이다. 익숙함의 함정에 빠져 우리가 느끼지 못한 또 다른 힘있는 혁명들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https://youtu.be/a7F-3lkTlyc

베토벤 : 안단테 파보리 F장조 WoO 57

클라우디오 아라우, 피아노


 여기에 덧붙여, 베토벤이 원래 이 작품의 2악장으로 삽입하려고 했던 소품 “안단테 파보리”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런데 친구들이 원래 계획대로 곡을 쓰면 너무 길어질 것을 염려해서 이 곡을 독립된 소품으로 발표하고 론도 악장의 앞 부분을 서주로 처리한 것이다. 베토벤은 친구들의 이 제안에 처음엔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그런데 직접 접해 보면 베토벤이 화를 낸 심정이 이해가 된다. 규모가 더 커졌을지언정 “안단테 파보리”가 원래대로 2악장으로 삽입되었더라면 일말의 의심도 없이 확신컨데 더 혁명적인 피아노 소나타의 패러다임이 제시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 친구들의 식견이 베토벤의 혁명적인 생각에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실제로 베토벤은 40대 후반에 가서 쓴 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에서 무려 20분이 넘어가는 완서악장을 삽입해 전체 규모가 50분에 육뱍하는 작품을 기어코 써낸 바 있기도 하다. 어쩌면 친구들의 만류로 못다한 이상을 “함머클라비어”에 가서 구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베토벤은 결국 “안단테 파보리”를 독립된 곡으로 내놓았지만 그는 이 곡에 대한 애착이 남달라 공식석상에서 자주 연주했다고 한다. 그래서 연주자의 입장에서 베토벤의 “혁명 본능”을 제대로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실전에서 2악장의 서주 부분을 빼고 그 자리에 “안단테 파보리”를 삽입해서 연주하는 시도도 해봄직하다고 생각된다. 개인적으로 내게 리사이틀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렇게 해볼 용의가 있다!


 베토벤 발트는 아직 우리에게 이야기할 혁명의 스토리가 많다. 입시곡의 이미지로 덮어놓지 말자. 애호가의 입장에서 듣는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냥 “베토벤의 걸작 중 한 곡”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지 말고, 베토벤이 목에 힘줘 이야기하고 싶었던 음악의 혁명본능에 귀를 기울여보자. 그것이 또한 악성 베토벤에 대한 우리의 또다른 예우 방식 아니겠는가. 베토벤이란 위대한 인물은 그러한 예우를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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