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피아니스트를 꿈꾸며
슈만은 작곡가로서의 커리어 초장에 피아노곡을 대거 남겼는데, 이는 작품 목록이 확실하게 증명한다. 작품번호 1번부터 23번까지는 차례대로 모두 피아노곡이고, 넓게 따져 번호 30번대까지는 피아노곡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클라라와 결혼한 이후로는 장르를 바꿔 또 한동안 그 장르만 집중적으로 곡을 쓰는 경향을 보이고, 피아노곡은 산발적으로 한 곡씩 발견되는 정도다. 그런데 비교적 가지런하게 정리된 슈만의 피아노곡 목록에 비해 이것을 큰 그림으로 묶어 조명해주는 자료는 흔치 않다. 워낙 내포하고 있는 갖가지 요소들이 복잡해서 간단히 오버뷰로 정리해서 논하기가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작업은 필요하다. 큰 그림을 파악하기 어려울수록 역설적으로 큰 그림을 파악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작곡가가 슈만이기 때문이다. 이에 나는 슈만의 피아노곡들을 아래와 같이 몇 가지 테마로 묶어서 글로 정리해 보기로 한다.
1. 위대한 피아니스트를 꿈꾸며 – 아베그 변주곡, 나비, 파가니니 연습곡, 알레그로, 토카타
2. 내 사람들은 소중하니까! – 다비드 동맹 무곡, 카니발, 꽃의 곡집. 어린이의 정경, 어린이를 위한 앨범
3. 클라라, 너를 포기할 수 없어! – 피아노 소나타 전곡, 판타지, 아라베스크, 크라이슬러리아나, 8곡의 노벨레텐, 환상소곡집 op.12
4. 내 감정은 나도 몰라, 너무 복잡해 – 유모레스크, 빈 사육제, 환상소곡집 op.111, 아침의 노래, 3개의 로망스,
슈만 : 아베그 변주곡 op.1
랑랑, 피아노
먼저 다룰 카테고리는 처음에 피아니스트를 꿈꿨던 슈만의 포부와 감성이 담긴 곡들, 아베그 변주곡, 나비, 파가니니 연습곡, 알레그로, 토카타 등 비교적 초기에 탄생한 작품들이다. 이들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다른 슈만 작품들에 비해 피아니스틱한 기교가 두드러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그렇다고 이것으로 이 초기 작품들을 깔끔하게 정리하기에는 모호한 부분이 있으므로 좀더 디테일한 서술은 필요하다. 작품번호 1,2에 해당하는 “아베그 변주곡”과 “나비”는 중요한 작품들이다. 슈만의 음악 인생에서 나아갈 중요한 방향성을 담고 있는 곡들이기 때문이다. “아베그”에 해당하는 스펠링 A,B,E,G,G는 주제의 음 이름에 해당한다. 이러한 암호 같은 문자와 계이름을 사용하여 주제를 제시하는 슈만의 수법은 향후 그의 작품들에서 숱하게 볼 수 있다. 슈만이 이 주제를 가지고 전개하는 방식은 매우 과감하고 독창적이다. 전통적인 방식의 변주곡의 틀을 살려 놓으면서도 과감히 틀을 깨기도 하며, 전체적으로 청아하고 예쁜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으면서도 부담스러울 정도의 번뜩임이 느껴지기도 한다. 한 마디로 갓 스무 살이 된 슈만의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작품. 그는 이 곡을 쓰며 어머니에게 “나는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라는 기쁨의 편지를 보낸 바 있다. 개인적으로 봤을 때 이 작품은 전형적인 슈만의 작품의 특성이 잘 드러나지만 동시에 정체성이 모호하기도 하다. 아직은 문학적이고 암시적인 부분이 크게 나타나지 않고 기교적으로 화려한 부분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물론 악보 중간중간에 나타나는 세밀한 악상 지시는 향후의 슈만의 방향성을 예견하는 증거로 충분하다. 그래서 테크닉과 음악성을 고루 기를 수 있는 곡으로 어느 정도 실력이 된 초등학생들의 콩쿨곡으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슈만 : 나비 op.2
클라우디오 아라우, 피아노
이렇게 자신감에 차서 화려한 기교를 아낌없이 쓴 아베그 변주곡에 비하면, 다음 작품번호에 이어지는 “나비”는 좀더 문학적이고 암시적인 요소를 많이 추가했다. 일단 이 작품에 영향을 준 문학 작품은 장 폴 프리드리히 리히터의 미완성 장편 소설 “개구쟁이 시절”의 마지막 챕터 “애벌레의 춤”이다. 상반된 성격의 두 남자가 한 여자에게 구애를 하는, 어떻게 보면 좀 상투적이고 천박하기까지 한 내용이지만, 슈만은 이 단순하다 싶은 이야기에 문학적인 상상력를 잔뜩 투영해 놓았다. 즉, 이후로의 슈만 음악세계에 막중한 비중을 차지하는 문학과 음악의 결합의 시조 격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인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이 작품은 연주자에게 예민한 색채감과 소리의 미세한 변화에 대한 세심한 감수성을 요구한다. 기교적인 면에서는 전작인 “아베그 변주곡”에 비해 상당히 심플해진 느낌이 있지만, 음악적 표현의 깊이는 반대로 엄청나게 깊어졌다. 쉽게 말해 음악 자체의 내재적인 의미보다 음악외적인 배경 이해의 중요성이 더 큰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곡 역시 “아베그 변주곡”과 마찬가지로 피아노를 좀 잘 치는 초등학생들에게 내주는 경우가 많은데, 개인적인 견해로는 그다지 좋지는 않다고 본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곡은 음악 외적인 변수가 해석에 많이 작용하는 곡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수들을 초등학생의 발달 수준으로 통제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이어지는 “파가니니 연습곡”은 슈만이 파가니니에게서 받은 음악적 영감의 표현이다. 전작인 “나비”가 문학에 대한 경의를 표현한 작품이라면, 파가니니 연습곡집은 음악적 비르투오시티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었다. 그래서 연습곡이라는 타이틀에 결맞지 않게 영감 위주로 쓰여져 있고, 피아노 기교에 대한 실험적인 시도들이 가득하다. 사실 파가니니에게 영감을 받은 작곡가들이 한두 명이 아니라는 것은 상식이다. 슈만 역시 자신의 방법으로 파가니니로부터 받은 영감을 소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문헌적인 중요도는 조금 떨어질지 모르겠지만, 주어진 예술적 영감을 소화하는 슈만의 방식이 어떤 것인지를 고찰하자면 결코 허투루 넘길 수 없는 작품이다.
슈만 : 토카타 op.7
이보 포고렐리치, 피아노
작품번호 7,8번에 해당하는 “토카타”와 “알레그로”는 슈만의 원래의 워너비가 무엇이었는가를 알 수 있어 매우 흥미롭다. 이 작품들은 두 작품의 성격은 상당히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기교가 매우 어려운 작품들이다. “알레그로”의 경우 흡사 쇼팽을 연상시키는 시정이 있는가 하면 베토벤이 소나타에서 구사한 화려한 음향효과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등 음악이 슈만 작품치고는 상당히 외향적이다. “토카타”는 슈만 본인이 자신이 쓴 피아노 작품들 가운데 가장 어렵다고 스스로 말한 작품이다. 그래서 기교적으로도, 음악적으로도 매우 난이도가 높다. 우리는 보통 슈만은 외향적인 효과만을 노린 음악을 혐오한 인물로 알고 있는데, “토카타”는 그런 슈만의 성향에 비추어 봤을 때 상당히 미스테리한 작품이다. 그가 이 곡에서 구사한 테크닉의 난이도와 연주 효과는 동시대에 활동했던 리스트의 그것보다도 어려우면 어려웠지 절대로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두 곡은 작곡연도를 감안하면 의문이 풀린다. 슈만이 손가락 부상을 당하기 전에 쓴 곡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비크 교수의 문하로 막 들어갔을 때의 슈만의 목표는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였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가 손가락 부상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리스트와 자웅을 겨룰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로 성장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원래는 음악과 문학의 갈림길 사이에서 진로를 고민했던 슈만이 음악으로 자기 갈 길을 정하고 쓴 극초기의 피아노 작품들은 그의 상상력과 창조력을 바탕으로 한 피아니스트로서의 청운의 꿈이 잘 드러나는, (이후의 작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굉장히 피아니스틱한 작품들이다. 그러므로 이 초기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위대한 피아니스트를 꿈꾸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면서도 이 작품들에서 문자를 음이름으로 써서 암시적인 주제를 제시하는 등 앞으로 계속될 슈만의 주요 키워드 또한 뚜렷하게 파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