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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나 Nov 18. 2020

0개 국어 화자

 '0개 국어 화자'

 해외에서 오래 생활한 사람들이 자조적으로 쓰는 말이다. 현지어를 하기는 하지만 모국어 수준으로 보기엔 부족하고, 한국어는 오랫동안 안 써서 종종 단어가 생각이 안 나거나 문법적으로 어색한 문장을 구사하기 때문에 한국어를 모국어라고 하기도 좀 뭣하다 싶은 애매한 상태.


 외국어와 한국어를 쓰는 일을 하니까 누구보다 외국어에 자신이 있었고, 또 새로운 외국어를 배우는 것도 너무나 즐겁기 때문에 난 5개 국어 화자, 6개 국어 화자, 7개 국어 화자.. 그렇게 할 줄 아는 언어가 술술 늘어날 것만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같은 날은 나도 0개 국어 화자가 되어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동네에 한국인 아기 엄마들이 꽤 많이 있다. 연락하며 지내는 사람은 서너 명이었는데, 그 사람들이 아는 다른 한국인 엄마들도 더 있으니 언제 한번 다 함께 모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래서 단체 챗방을 꾸려서 사람들을 초대하고 언제 만날까 이야기를 하던 중, 나도 모르게 한국어가 생각이 나질 않아 그냥 영어로 써버렸다. 같이 챗방을 만든 다른 한국인 엄마 한 명은 나와 친하게 지내는데, 우리는 둘이서만 만나도 영어로 대화를 해왔다. 딱히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냥 처음에 한국인인 줄 모르는 상태로 슈퍼마켓에서 아기 나이가 비슷해 보인다며 통성명할 때부터 영어로 대화를 했기에 그 이후에도 계속 그래 왔다. 단체 챗방에 초대한 다른 멤버들도 국제결혼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영어로 대화하는데 문제가 없다. 그걸 알고 마음을 편히 먹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생각나지 않는 한국어 단어를 굳이 떠올리는데 시간을 쓰기 귀찮았던 게 진짜 이유다.


 그렇게 채팅을 이어가는데, 아직 대화에 참여하지 않던 한 엄마가 초대해 줘서 고맙다며 자기소개를 하더니 "다들 해외 생활 오래 하셨나 봐요. 영어를 잘하시네요..." 이렇게 한 줄을 더했다. 그 메시지를 읽는 순간의 창피함이란.


 내가 언제부터 0개 국어 화자의 길로 들어섰으려나 되짚어 보는데 옛날 일이 생각났다. 독일로 간지 3년인가 지난 방학 때 한국에 갔는데, 그때 가족들과 대화 중 한국어 단어가 생각이 나질 않아 그 내용을 풀어서 설명을 한다든가 아님 독일어로 말해버리곤 했다. 그때 동생이 개그맨을 흉내 내며 나를 놀렸던 게 떠올랐다.


 "저, 한쿡말 잘 못해요~"


 그땐 같이 배꼽을 잡고 웃었지만, 그게 진짜 재미있어서 웃은 것은 아니었다. 잊히지 않도록 내 정신에 각인되었을 것이 분명한 모국어가 사라져 가는 그 불편한 느낌이 당황스러워서 헛웃음이 나왔을 뿐.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가 제일 잘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한국어인데, 요즘 들어 어찌나 어렵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특히 글을 쓰면서 하는 고민은 끝이 없다. 살면서 나를 뒤흔든 충격이나 보다 원론적인 질문들. 깊은 사유의 결과물(?)을 기록하고 싶지만, 그러기엔 내 기억 속 한국어가 참 비루하다. 본차이나 도자기 접시를 생각하고 글을 쓰는데 노트북 화면에 나타난 결과물은 일회용 플라스틱 접시. 나도 정말 0개 국어 화자가 되어버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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