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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나 Nov 17. 2020

오늘은 춤을 추자

 맥주와 함께 한 고요한 나만의 밤. 아기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고,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도 없는 다섯 평 남짓한 이 방은 내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호화로운 자유다. 어젯밤엔 그렇게 침대에 대자로 누워 빳빳했던 침대보와 버석거리는 볼인사로 마주하곤 솔솔 잠이 들었다.


 커튼 사이로 살며시 들어와 내 얼굴을 비추던 햇빛의 따스함이 좋아 그대로 햇살을 껴안고 뒹굴거렸다. 집에서 아기들에게 집중하며 24/7 바짝 긴장된 상태였을 때와는 정반대인 나른한 여유. 하루 종일 이렇게 지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정신이 번쩍 들게 둥둥 거리며 음악이 흘렀다. 소리가 들리자마자 용수철이 튕기듯 자동적으로 몸이 침대에서 떨어졌다. 작은 소리 하나에도 아기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벌떡 일어나던 게 훈련이 된 게 분명하다. 육아는 몸이 기억한다더니...


 얼굴까지 벌겋게 만드는 심장의 쿵쾅거림을 한 손으로 다독이며 소리의 근원지를 찾으니 책상에 놓인 핸드폰이었다. 어제 가출 기념으로 핸드폰을 진동에서 다시 벨소리로 해 놓은 것을 잊었다. 보험 광고일 게 뻔한 번호라 받지 않았지만 통화를 거절하지도 않고 흘러나오는 벨소리를 들으며 발로 리듬을 탔다.


 흘러나오던 노래는 Thalia와 Gente de zona의 lento. 뜨거운 열정을 어쩌지 못해 춤출 수밖에 없다는 멕시코와 쿠바의 가수들이 함께 한 라띠노 특유의 관능적이면서도 흥겨운 노래. 'lento'는 '천천히'라는 뜻인데 끈적한 레게톤도 그렇듯, 내 몸은 천천히 움직일 수가 없다. 흥이 넘쳐 엉덩이와 어깨가 들썩들썩. 벨소리가 끝나니 아쉬워서 유튜브에서 다시 들었다. 뮤직비디오에선 화끈한 몸매의 딸리아가 파파라치를 피해 달아나선 헨떼 데 조나와 함께 해변에서 춤을 춘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한 손엔 핸드폰을 들고 몸을 흔들다 눈을 감으니 내 몸도 뜨끈뜨끈한 마이애미 비치 한가운데다.


 생각났다. 이 노래를 벨소리로 했던 이유. 2018년 겨울, 첫째를 임신해서 배불뚝이였을 때. 그전까지 다니던 댄스 클래스에 못 가니 집에서 종종 라틴노래를 틀어놓고 혼자 춤을 췄었다. 그땐 매달 새로 발매되는 라틴음악을 찾아 듣고 마음에 드는 노래를 벨소리로 저장했었다. 그래, 그랬었지. 2018년 겨울에 발표된 노래. 한두 달 듣고 2019년 1월 출산한 날로부터 내 핸드폰은 진동 모드였다. 조그만 소리에도 잠에서 깨던 첫째 덕분에 초반엔 무음으로만 생활하기도 했었고 연년생으로 둘째를 가졌기에 내 폰은 여전히 진동 모드. 근 2년간 벨소리 한 번 울려본 적 없는 핸드폰이, 마침 울린 벨소리가 2018년 겨울의 유행곡이라는 사실이, 꼭 출산한 날부터 '엄마'에 덮여 희미해진 '나'를 확인하는 것 같다. 엄마가 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행복하다. 하지만 동시에 엄마가 되기 이전의 내가 때때로 그리워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원래 다른 계획이 있었지만, 그냥 즉흥적으로 살아 보고도 싶다. 오늘은 춤출 것이다. 이 골방에서 춤을 춰봤자 제자리에서 들썩이는 거나 마찬가지겠지만. 창문 밖 50미터도 안 되는 거리엔 빼곡히 들어찬 옆 동 아파트 사람들이 보이지만, 난 커튼을 치지 않을 것이다. 내리쬐는 햇빛을 받으며 눈을 감고, 내가 꿈꿔오던 뜨거운 섬 쿠바에 와서 춤을 춘다고 상상하며 그렇게 해방감 충만한 하루를 보낼 것이다. 지난 2년간 발표된 라틴노래도 들어보고 벨소리를 바꿔야겠다. 물론 일주일 후 다시 진동 모드로 돌아가겠지만, 그래도 그전까지 몇 번은 울릴 일이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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