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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나 Jan 04. 2021

반쪽짜리 성공

2021년 첫 하이킹

 짝꿍이 지어준 별명이 있다. Mountain goat (산양)이다. 채석장이 있던 산 동네에서 자란 어린 시절 덕인지, 운동부족인 몸에도 불구하고, 하이킹을 가면 꽤나 그럴싸하게, 신나게 산에 오른다. 산이 없는 평지인 런던에서 자란 남편은 처음엔 산에 오르는 것이 어렵다 했었는데, 홍콩에서 몇 번 다니더니 오후에 해 질 녘에 올라가 산과 바다를 한꺼번에 보는 매력에 푹 빠졌다.


 2021년이 되고 처음 맞은 일요일. 인터넷 일기예보에선 이번 주말이 추울 것이라 했지만, 막상 오늘 아침이 되고 보니 햇빛은 따스하고 바람은 시원한 것이, 동네 산책만 하기엔 너무 아까웠다. 오후에도 푸른 하늘이 변함없었기에 오늘 올라간다면 멋진 노을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약 3년 전, Dragon's Back 이후로는 아기 낳고 돌보느라 하이킹은 생각도 못했는데 엄마들 단체 챗방에서 종종 하이킹 후기를 읽어서 나도 모르게 용기가 샘솟았나 보다. 남이 했으니 당연히 나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아직까지 얼얼한 다리를 주무르다 보니 헛웃음만 나온다.


 어쨌든, 좋은 날씨 때문에 바람이 한껏 들어, 남편과 아기들을 한 명씩 힙시트 캐리어로 안고 Devil's Peak로 출발했다. 해넘이만 보고 바로 집으로 올 것이라 배낭을 단출하게 쌌지만, 배낭보다 무거운 것이 아기들이었으니... 튼실한 우리 아기들의 무게를 너무 얕잡아 봤다. 23개월 첫째는 14kg, 5개월 둘째는 10kg. 동네에서 바닷가 산책을 할 때나 쇼핑몰을 다닐 때에 자주 힙시트를 써서, 이렇게 한참 걷는 것에는 익숙했지만, 경사진 산길을 오르려니 역시 쉽지 않았다. 마스크 쓴 채로 다녀야 했기에 숨을 들이쉴 때마다 콧구멍으로 마스크가 쏵 딸려왔는데, 코가 컸으면 그나마 그 사이 새 뜨는 공간이 생겨 숨쉬기 수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쳐갔다.


 열심히 걷고 또 걷고. 처음엔 씩씩하게 장군처럼 걸었으나 점점 시간이 지나자 내 패턴은 다섯 걸음 걷고 하늘 보고, 바다 보고, 물 한 모금 마시고. 점점 더딘 속도로 발걸음이 떨어졌다. 아기들은 둘 다 곤히 잠에 빠졌고, 남편과 나는 점점 붉게 물드는 하늘을 보며 도착 예정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누구도 먼저 포기하자고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는지, 서로 묻기만 했다.


 "어때? 아직 갈 수 있겠어?"


 "응, 나는 꼭 갈 거야."


 붉은색과 보라색이 오묘하게 섞여 퍼지는 노을, 새털구름인가 하는 하늘에 길게 줄무늬를 새기는 구름. 불을 켜기 시작하는 홍콩섬의 고층 빌딩 숲. 저만치에 무인도 같은 작은 바위섬들을 품은 바다. 쏴아 하는 파도소리에 쏴르륵 하고 답하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그것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인생샷이 나오겠지.


 '그래, 나에겐 생수 한 병도 있고, 아직 힘이 남아 있어. 난 꼭 목표점까지 오를 거야. 난 한다면 하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점점 하늘은 어두워지고 나는 체력이 부침을 실감했다. 멈춰야 할 때를 아는 사람이 지혜롭다 하지 않던가! 우리는 오늘 지혜로웠다.


 하이킹 코스에서 딱 절반가량을 남겨둔 채, 미련 가득한 눈으로 언덕 너머 노을을 바라보며 남편과 나는 다음을 기약하며, 가던 길로 다시 내려왔다. 나 혼자서야 어떻게든 꾸역꾸역 올라가겠지만.. 앞에 잠든 아기를 한 명씩 대롱대롱 달고 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야심 찬 우리의 첫 하이킹은 반쪽짜리 성공으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딱히 섭섭하진 않았다. 헬스장에 발길을 끊은 지 4년이나 된 몸으로 10kg 아기를 메고 하이킹 코스 반 씩이나 올라갔으니, 이 정도면 대만족이다.


 내려오다가 아쉬움에 뒤를 돌아보니 하늘이 너무나 예뻤다. 높고 푸른 하늘에 시원한 바닷바람. 그냥 내려가기가 아쉬워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봤지만, 내 눈에 담은 신비로움만큼 사진에 담을 수는 없었다. 오늘은 절반의 성공이었지만, 다음번엔 성공할 수 있겠지. 그나저나, 둔한 몸으로 운동을 해서인지, 다리 근육통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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