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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나 Feb 02. 2021

맥시멀리스트와 미니멀리스트의 경계에서

새해맞이 집 정리 중

 새해도 맞았겠다, 이 땅콩만 한 집에서 여백의 미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을 좀 만들어보고자 하루에 방 한 칸씩 정리를 했다.


 "아기 있는 집들이 다 그렇지 뭐. 이건 다 아기 물건이야. 나는 깔끔하고 정돈된 삶을 사는 사람이지만 아기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정신없는 집 풍경을 만들어내는 거라고."


 아기의 존재는 꽤나 쓸모 있는 핑계였다. 꺼내도 꺼내도 계속 나오는 내 물건들을 보기 전까지만.


 옷장을 열었다. 친구 결혼식이나 파티에서 입었던, 실용성이라곤 손톱만큼도 찾을 수 없는 드레스들, 옥토버페스트에서 입어야 하는 던들, 중동 여행 때마다 입겠다며 아부다비에서 몇 벌 구입한 아바야, 그린란드에 사는 친구를 방문할 때 눈밭에서 신어야 한다며 남겨둔 방수 털 부츠, 모스크바에서 4월에 내리던 눈꽃을 맞으며 샀던 샤프카 털모자 등.


 일 년 중 대부분이 여름 날씨인 홍콩에선 쓸 일이 없는 방한 용품들과 전통 의상들. 이제 언제 다시 여행을 다닐 수 있을지 불확실한 지금, 언제 입고 신을 수 있을지 모르는 것들을 이렇게 끌어안고 있는 것은 미련한 짓이 아닌가 싶었다.


 날씨도 점점 좋아지고 있으니, 정리하는 김에 겨울 옷을 넣고 여름옷을 꺼내겠다며 열어 본 수납함에선 더 기함할 물건이 나왔다. 대학생 때 동생이 입은 것을 보고 맘에 들어 동생 몰래 기숙사로 가지고 와버렸던 미니스커트. 아이고야. 아직까지 말짱한 데님 소재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입어봤다. 괜한 짓을 했다. 15년의 세월이 내 다리에 나이테를 둘렀나 보다. 무릎부터 올라오질 않는다. 게다가 왜 아직도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는, 10년도 더 된 보풀이 생긴 후드티도 찾았다. 지난 수년간, 이 후드티의 유일한 역할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장에서 수납함으로, 또는 그 반대로 위치를 옮겨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상기하자마자 당장 미니멀리스트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그래, 나는 미니멀리스트가 되는 훈련이 필요해.'


 때때로 마음을 비워야 마음에도 여유가 생기듯, 물건들을 비워야 내 생활에도 여유가 생길 테니, 어디 한번 해보자. 비움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옷가지들을 접어 문 옆에 차곡차곡 쌓았다. 오늘이 가기 전에 이것들과 꼭 작별하고 말리라. 그런 각오로 시작했건만. 다 쌓고 나니 다른 생각이 슬금슬금 마음을 비집고 나왔다.


 '꼭 지금 당장 버려야 하나?'


 일단 한쪽 구석에 쌓아놓고 나면 속 시원하게 버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미니멀리스트의 길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막상 버리려 하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버리자마자 쓸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너무나 새것 같은 옷을 버리면 낭비가 아닌가, 가뜩이나 넘쳐나는 쓰레기로 지구가 걱정이 되는데. 이 옷은 친구랑 세트로 맞춰서 하나씩 산 건데. 이 옷은 남편이랑 데이트하던 시절에 산 건데. 이건 엄마가 사준 건데...'


 결국 내가 의미를 부여한 옷들을 주섬주섬 다시 집어 들었다. 하지만 칼을 뺐으니 무라도 썰기는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반 정도는 걸러내어 필요한 사람들에게 기부했다. 쓰임을 찾았으니, 낭비한 것은 아니어서 다행스럽지만 한편으론 내 기억이 조각나 떨어지는 느낌이라 아쉽기도 하다. 나도 정원이 있는 이층 집 같은 곳에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면 방 하나를 통째로 '추억의 방'으로 만들 수 있을 텐데. (이건 말이 '추억의 방'일뿐 실제로는 '창고'가 되겠다.)


 나는 지난날의 흔적이 남아있는 물건들을 좋아한다. 그것들과 앞으로도 함께하며 더 긴 시간의 흔적을 남기고 싶은 걸 보면 천상 맥시멀리스트인가 보다. 다만 현재의 주거 상황이 내 취향을 존중해주지 못할 뿐. 며칠을 정리해도 이전과 별반 차이 없는, 잡동사니 빼곡한 나의 둥지를 보며, 내 라이프 스타일 목표는 오늘도 미니멀리스트와 맥시멀리스트 사이를 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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