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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나 Mar 12. 2021

우리집 짬뽕컬쳐

TCK남편과 살며 TCK아이들 키우기

 TCK(Third Culture Kid, 제3문화 아이들)는 성장기(정체성을 확립하는 시기)를 부모의 문화와는 다른 문화에서 보낸 사람들을 뜻한다. 그들은 부모의 문화나 거주 국가의 문화 중 하나를 오롯이 그들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문화의 겹침을 경험한 다른 TCK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며 그 새로운 그룹 - 이것이 제3의 문화이다 -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는다. 

 

 20세기에 들어 유학, 해외 취업,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이민자가 늘었다. 외교관이나 주재원처럼 주기적으로 수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있고, 고국을 떠나 한 나라에서 몇 대째 정착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느 경우든, 특정 외모나, 전형적인 이름을 가졌더라도 부모나라 현지 사람들과는 마인드가 다를 수밖에 없다.


 통상적 정의로 봤을 때 나 자신을 TCK로 소개하기엔 무리가 있다. 인생의 반을 한국이 아닌 유럽의 4개국에서 보냈지만, 그래도 주요 성장기는 한국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이런 나도 부모님 나라의 문화와 거리를 느낄 때가 많은데, 성장기를 모두 외국에서 보냈다면, 얼마나 더 큰 문화적 거리를 느낄지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내 남편은 완전히 TCK다. 시부모님은 둘 다 인도 출신이지만 그들은 20대 때부터 미국에서 생활했고 남편도 미국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첫돌을 맞기도 전에 시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영국으로 옮겼다. 영국에서 자랐지만, 학교는 미국 학교를 다녔다. 시부모님에게 언젠가는 미국으로 다시 돌아갈 계획이 있었던 것 같다. 남편은 둘 다 할 수 있음에도 미국식 영어를 더 편하게 여긴다.(영국식 영어를 좋아하는 나는 이 점이 아쉽다. 이 남자랑 결혼하면 휴 그랜트처럼 말하는 사람이랑 매일 대화하게 될 줄 알았는데 말이다!)

종교는 부모님을 따라 당연히 힌두이지만, 종교적이지 않아서 힌두교식 명절을 지내지는 않는다. 샌드위치, 피자, 파스타를 먹고 자랐고, 내가 한국의 X뚜기 카레를 만들어 주면서 커리를 먹기 시작했다. 인도 음식을 좋아하는 내게 인도음식을 못 먹는 인도인의 존재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

인도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크리켓을 잘 모르고, 관심도 없다. 그에게 스포츠는 축구와 농구가 최고다. 부모님의 언어인 텔루구와 힌디, 둘 다 조금 알아들을 수는 있지만 글씨를 쓰거나 읽지는 못한다. 미국적인 것과 영국적인 것 둘 다 익숙하지만 어느 한 나라도 완전한 고향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서 애국심(?!), 소속감 같은 걸 느끼는 것 같지도 않다.


 "자기는 반쪽짜리 미국인에, 반쪽짜리 영국인에, 반쪽짜리 인도인이야? 정체를 밝혀봐!!!" 농담이라고 던지지만 어찌 보면 그것이 상태를 정확히 집어내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넌 정말 어디 사람이야?", "진짜 고향이 어디야?"라는 질문을 한다면,

 "어디도 내 고향은 아니야. 하지만 어디든 내 고향이기도 해."라는 심오하고 철학적인(?- 우파니샤드에서 내 존재는 여기에 있되 여기에 있지 않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는데 그것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답변이 돌아온다.


 이런 TCK인 남편과 예전에 American Desi(아메리칸 데시 - 여기서 데시는 산스크리트에서 유래한 힌디 단어로 보통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계 사람들을 말한다.)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주인공이 인도계 미국인 2세인데 자신의 본명인 "크리슈나고팔"대신 발음을 따서 영어 이름처럼 "크리스"라는 이름을 쓴다. 게다가 누군가가 그를 인도와 연결 짓는 말을 하려고 하면 "우리 부모님이 인도에서 왔어! (나는 아니야!라는 뜻으로)"라고 말한다.


 "우리 부모님이 인도에서 왔어!"는 내 남편이 내가 인도에 관해, 힌두교에 관해, 그들의 전통에 관해 물었을 때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기도 하다. 미국과 영국 등지에서 워낙 큰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는 데시들 이기에, 내 남편 같은 이런 TCK들도 아주 많다. 많은 1세대 이민자들은 이런 미국화된 이민 2세대, TCK를 ABCD라고 불렀다고 한다. American Born Confused Desi - 미국에서 태어나 정체성에 혼란이 온 데시. 부모님 나라의 문화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녀와, 현지의 문화를 이질적으로 생각하고 고국의 문화를 고집하는 부모 사이의 간극이 보이는 단어다.


 공식적 고향(?)인 영국을 떠나 홍콩에서 아기 때부터 살고 있는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가 겪은 것보다 더 폭넓은 문화의 다양성을 경험하고 있다. 우리 집은 설날과 추석은 한국식으로 축하하면서 홍콩식 축하도 따라 하고, 어머니날은 영국 날짜에 맞춰서 축하하고, 추수감사절은 미국식으로 보내고, 넘치고 넘치는 인도 명절 중에서 하나 골라 디발리를 축하하고, 크리스마스는 독일식으로 보낸다. 요즘은 영어, 광둥어, 만다린 세 가지로 수업하는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에게 나는 최대한 한국어로 말을 하려고 노력 중이다. 영어보다 못하기는 해도 한국어 단어도 섞어가며 말을 한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지만, 앞으로 아이들이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우리 엄마 아빠가 인도에서 왔어!"라고 하던 남편 때문에 배꼽을 잡고 웃었지만 그게 내 카르마일지도. 한국에 대해서 잘 모르고, 한국어를 잘 못하는데 누군가가 너는 한국인이지 않냐는 뉘앙스로 말을 한다면... 발끈해서 "우리 엄마가 한국인이지 나는 아니야!"라고 대꾸할지도 모르니까.


 어떤 한 문화에 전적으로 속해있지 않다는 것이 문화의 얕은 이해도로 해석되어 단점이 되기도 하지만, 다양한 문화를 겪으며 자란 시간이 길어지면서, 유연하게 변화에 대처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생긴다는 건 큰 장점이다. 그 장점도 단점도, 제3문화 - 우리 집 짬뽕 컬쳐 - 에서 살아가는 우리 가족이 겪어야 하는 일. 아침엔 홍콩식으로 시작해서 영국식으로 끝낸 저녁을 보며, 오늘도 이렇게 우리의 정체성을 쌓는 하루를 보냈구나 싶고,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기대도 되고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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