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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나 Jan 11. 2022

홍콩에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친구의 친구네가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출산했다. 한국에서였으면 조리원 동기인지 하는 친구 그룹이라도 있었겠지만, 런던에서 첫째를 낳고 홍콩으로 온 우리는 여기서 상황 비슷한 사람을 소개받은 것만 해도 감사할 일이었다. 사는 곳은 좀 거리가 있어도 아이들이 서로 잘 놀아서 자주 왕래하는 가족이 됐다. 얼마 전 그 집 아들이 만 3세가 되어 생일파티를 했다. 한국처럼 좋은 펜션이라고 할 수는 없는, 다분히 홍콩스러운 오래된 낡은 건물에 있는 뜬금없는 장소이기는 해도, 나름 부엌과 다이닝룸이 딸린 루프탑을 통째로 빌리는 바비큐 파티였다. 파티에 가기 전부터 친구에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 줄 것이라며 기뻐하던 우리 집 1호. 밖으로 놀러 간다니 마냥 좋아했던 우리 집 2호. 그러나 지독한 감기에 걸려 결국 생일 파티엔 남편과 나만 다녀왔다. 그 생일 파티에서 있었던 일이다.


파티 장소에 도착했는데 아직 장식이 끝나지 않았다. 그 집 헬퍼와 다른 엄마들이 열심히 풍선을 불어 벽에 붙이고 가랜드를 걸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옆으로 가 도울 일이 무엇이 있나 쓰윽 둘러보곤 아이들이 헬멧처럼 쓰고 놀 수 있는 동물 모양 박스 조립에 도전했다. 한 엄마가 이미 조립 중이었는데 평면도가 생각보다 어렵다며 그녀는 숫자가 어지러이 적힌 박스 조각을 이리 꽂았다 저리 꽂았다 열심이었다. 개중에 쉬워 보이는 동물- 상어-를 하나 골라 잡고 박스를 조립하기 시작했는데, 아이 생일 파티에 초대된 손님들이 우르르 도착했다. 어느덧 아이들이 바글바글 시끌시끌, 여기저기 풍선 터지는 소리에 정신은 없고, 아빠들은 고기를 굽는다며 고기뿐 아니라 맥주까지 들고 위층 루프탑으로 떠났다. 나의 작은 상어를 조립하고 있는데 어떤 남자아이가 내 옆에 와서는 그 상어 박스를 뒤집어쓰고 싶은 마음을 온몸으로 표출하고 있었다. 어쨌든 박스가 완성되려면 멀었기에, 나는 그 아이를 달래며 조립을 하고 있는데, 앉아서 편히 음료를 마시고 있던 그의 엄마가 날 힐끗 보더니 한 마디 하는 것 아닌가. 그것도 Could you로 시작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Make sure his fingers don't get a cut.(걔 손 안 베이게 조심해.)"


'당신은 누구길래 내게 그렇게 명령을 하시는지? 그대가 누구인지 궁금하오만?'

어리둥절한 내 얼굴을 보더니 더 가까이 와서 이전의 그 대사를 반복했다. 거기다 내가 영어를 잘 못 알아듣는다고 생각했는지 자신의 아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He likes it. He wants it. (우리 아들이 그거 좋아해. 그거 가지고 싶어해.)"

'난 당신이 지금 무슨 실수를 저지르는지 너무나 잘 알겠다. 그나저나 후회할 텐데.'

한 번 더 같은 말을 듣고서 나는 얼굴을 굳힌 채로 그녀에게 말했다.

"Since he likes it so much, why don’t you finish it together? My kids are not here today, so I won't be taking this anyway.(당신 아들이 그렇게 좋아하는데, 그럼 같이 만들지 그래요? 우리 애들은 오늘 여기 안 와서 어차피 이거 내가 가져갈 것도 아니니까.)"

그제야 자신이 실수했음을 인지한 검은 생머리의 그녀의 얼굴은 케첩을 바른 것 마냥 빨개졌다. 나는 '그래, 둘이서 잘 만들어 봐.' 하며 당황하는 그녀의 손에 한사코 상어 박스 조각을 쥐어주고 맥주 한 병과 함께 옥상으로 향했다.


홍콩에서 헬퍼들에게 막 대하는 중국 대륙 엄마들이나, 홍콩 엄마들의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들어서 잘 알고 있는데, 이럴 때 보면 정말 헬퍼들이 불쌍하다. 내 무엇을 보고 그렇게 판단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녀는 나를 헬퍼로 착각했다. '나는 너보다 높은 사람이야.' 하는 태도를 숨기지 않았으니까, 누가 봐도 그녀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뻔했다. 모르는 사람들과 파티하는 곳에서도 그런 태도로 남의 집 헬퍼에게 말하는 사람이 과연 자기네 집 헬퍼한테는 좀 나을까?


우리와 친구인 생일파티 호스트 가족의 성정을 봤을 때, 인성이 이상한 사람이랑은 교류를 할 사람들이 아닌데 이런 친구가 있다니. 하긴, 홍콩 살이를 아주 오래 한 남편의 직장 동료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네가 보기엔 프로페셔널하고 똑똑하고 쿨하고 친절하고 아주 멋진 사람인데,  그 사람이 자기 헬퍼한테 대하는 모습은 완전 다른 사람일 수 있어. 그걸 보면 인간에 실망하게 될 거야.


위층에 올라가니 아이들 소음과 떨어져 여유롭게 바비큐와 맥주를 즐기는 아빠들이 있었다. 남편은 파티 호스트 하는 부부와 함께 그릴에서 고기를 굽고 있었고. 그 옆에 쪼르르 가서 고기를 집어 먹는데 남편이 말했다.


"어떤 중국인 엄마가 나보고 여기 매니저냐고 묻더라." 이건 또 무슨 소린지. 고기 굽고 있던 아빠들이 여럿인데 어떤 엄마가 굳이 내 남편에게 와서 매니저냐고 묻고 화장실 등 이것저것 묻더란다. 이런 건 너무 뻔해서 이제 식상하기까지 한데, 거기 온 손님들의 반은 아시아인 얼굴, 나머지 반에서 1명 뺀 손님들은 유럽인 얼굴, 그리고 남은 1명이 초콜릿 얼굴 내 남편. 그 엄마는 외모 보고 내 남편이 여기서 고기 굽는 직원이라고 생각한 거다. 난 남편에게 어떤 엄마가 나를 헬퍼로 착각했고, 그래서 상어 박스를 다 조립하지 않고 여기로 올라왔노라 이야기했다. 내가 옥상에 있는 동안 흰 스웨터를 입은 그녀는 한 번도 옥상에 올라오지 않았다. 아마 마음이 불편했겠지. 내가 파티 호스트에게 이야기할까 걱정이 되었을 수도 있고.


집에 돌아오니 그룹 챗에 생일 사진이 줄줄이 올라왔다. 생일 축하 가랜드 앞에서 모두 서서 찍은 사진에 그 엄마와 아들도 찍혔다. 그녀를 가리키며 남편에게 말했다. "아까 나 착각한 사람, 이 사람이야." 남편이 갑자기 껄껄대고 웃었다. 남편을 매니저로 착각했다는 엄마도 그 사람이란다. 사람들이 여럿 모인 그 공간에서 우리 둘을 콕 집어서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판단 하기도 어려웠을 텐데, 우연이라 쳐도 참 대단하다. 그 중국인 엄마는 친구 말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기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순수할 그녀의 아들이, 그런 것은 배우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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