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주면 다시 런던으로 출근을 해야 하기에 이번주 내내 친구들과 점심 약속을 잡았다. 오래간만에 만나는 친구들과 분위기 좋은 곳에 갈 생각으로 모처럼 화장을 하고 있는데 아이들을 같은 유치원에 보내는 홍콩 엄마 M에게 문자가 왔다.
"너 어디야? 난 거의 다 왔어. 같이 들어가자."
나는 그녀가 본인 친구에게 보낼 문자를 잘못 보낸 줄 알았다.
"오늘 우리 만나기로 했어?"
그랬더니 그녀에게 바로 전화가 왔다. 받자마자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늘 유치원 K2 커리큘럼 소개 프레젠테이션이잖아! 너 어디야? 이거 학부모가 필수로 들어야 해. 뭘 하고 있든 당장 멈추고 빨리 와! 내가 자리 맡아 놓을게!"
심장이 벌렁벌렁. 아이고, 우리 애들 입시 망했다! 화장품은 탁자 위에 내팽개친 채, 지갑과 핸드폰만 핸드백에 쑤셔 넣고 택시를 잡아타고 유치원으로 향했다.
도착해서 교회당 문 닫기 전 막바지로 들어가는데, M은 또 어찌나 열의에 가득 찼는지, 맨 앞자리에 앉아있었다. 살금살금 걸어 그녀의 옆에 앉았다. 일찍 와서 다른 엄마들과 정보 공유에 열을 올리던 그녀는 뒷 줄에 앉은 다른 엄마들을 소개해줬다. 그중 한 명은 첫째가 K3학년에 있고, 오늘 이미 홍콩에서 랭킹 3번째라는 모 초등학교에 가서 면접을 보고 오는 길이란다. 주변의 엄마들은 안 듣고 있는 듯하다가도 학교 이름을 듣더니만 면접이 어땠는지 질문하느라 바빴다. 나의 비루한 광둥어가 이럴 땐 감사하다. 딱히 별 말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나를 이상한 엄마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어가 안 되어서 못 끼어드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잠시 후 교장 선생님이 등장해서 K2 학년의 교과 과정에 대해서 설명하고, 학부모가 아이의 발달 단계에 맞춰 집에서는 어떻게 해 줘야 하는지 등을 설명했다. 나는 간간이 화면에 올라오는 내용을 사진으로 찍어 구글 번역기를 돌려봤는데, 괜히 혼자 사진을 찍는 것 같아 민망해서 옆을 한 번 둘러봤다가 깜짝 놀랐다. 모두들 너무나 열심히 교장 선생님의 이야기를 받아 적는 것 아닌가! 그 모습이 사뭇 진지하여, 나와 몇몇을 제외한 학부모들은 마치 정부 브리핑룸에 들어온 청와대 출입 기자들 같았다. 그들이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받아 적는 교장 선생님의 말이 명문 학교 진학의 비밀이라도 된다는 듯, 교회당엔 교장 선생님 목소리와 종이에 필기하는 소리만이 사각사각 울렸다.
프레젠테이션이 끝나자 엄마들이 우르르 빠져나간다. 그러면서도 대화의 주제는 여전히 교육이다. 초등 입시는 이제 시작이다. 우리에겐 1년의 시간이 있고, 그 안에 완벽한 준비를 해야 한다며 아이들 수업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아예 사립학교 인터뷰에서 떨어질 경우를 대비해서 뺑뺑이로 갈 수 있는 정부 학교 중에서도 명문이 모여있는 학군으로 이사를 준비하기도 한다. 내 아이들이 다니는 유치원은 코즈웨이베이 지역에 위치하고 있고 이쪽도 학군이 좋아서 매년 여름이면 렌트비가 더 오르는 것 같다. (홍콩은 대부분 학기가 9월에 시작하기 때문에 7, 8월에 학군 좋은 동네로 이사를 하려면 집 찾기가 쉽지 않다.) 어떤 엄마는 내겐 딸들만 있지 않냐며, 명문 여학교 옵션은 카울룬통이 더 낫다고 어차피 이사를 할 거면 그리로 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프레젠테이션이 끝나자 한 학부모가 요점정리 한 것을 그룹챗에 올렸다. 2시간 동안 이걸 다 받아 적었다니 정말 대단하다. 이렇게 타이거대디들에게도 깜짝 놀란다.
작년엔 아이들이 이런저런 클래스 다니는 것으로 타이거맘의 클리셰를 확인했는데, 1년이 지난 지금, 본격적인 초등 입시 기간에 돌입하고 나니 홍콩 타이거맘들은 정말 내 상상을 넘어선다. 사실은 엄마들 뿐만이 아니라 아빠들, 할머니 할아버지들까지 아이들의 입시에 큰 열의를 가지고 임한다. 한 아빠는 지난 몇 해 간의 사립학교 지원 일정의 데이터를 분석해서 내년에도 언제쯤이면 원서를 받기 시작할 것이고, 언제쯤 서류 통과자가 발표가 날 것이며, 언제쯤 면접이 있고 합격자 발표가 날 것인지 대략적으로 계산해서 그 데드 라인에 맞춰 아이의 포트폴리오를 준비하고 있다고 학부모 모임에서 밝히기도 했다. 나는 그 아빠는 직업이 교육 컨설턴트인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교육과는 전혀 관련 없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다.
홍콩의 교육열이 높은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기본적으로 바뀌지 않을 이유가 있다. 사람은 많고, 대학은 9개뿐이라는 것. 그래서 매년 졸업생 중에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사람 수가 적다 보니, 경쟁이 심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물론 돈이 많은 사람은 홍콩 내 대학 대신 유학을 보내는 되는 옵션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겐 홍콩 내 대학에 합격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유치원에서의 경쟁이 높은 이유는, 좋은 초등학교를 들어가야 하니까. 특히 세컨더리와 연결된 학교의 경우 중학교 입시를 안 치러도 되기 때문에 입시 경쟁을 덜 겪고자, 결국은 더 치열해진 초등학교 입시에 뛰어들게 되는 것이다. 연결이 된 세컨더리 학교가 없다고 하더라도 명문 초등학교를 나오게 되면 세컨더리 입시에서 메리트가 있으니까 명문학교로 지원자가 몰리게 된다. 그리고 그런 명문 초등학교에 많이 보낸다고 소문이 난 명문 유치원에 지원자가 많이 몰리게 되고, 나중엔 그런 명문 유치원으로 많이 올라간다는 너서리에 지원자가 몰려 입시 경쟁이 점차 어린 나이대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렇다고 명문 너서리에 보내지 않았으니 내 아이는 좋은 유치원, 좋은 초등학교에 합격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너무 일찍 포기하는 것 같다. 참고로 우리 집 첫째는 그냥 동네 홍콩 공립 너서리에 다니면서 명문 유치원에 합격했다.
사진은 얼마 전 1차 면접이 있었던 한 명문 초등학교의 대기실 화면이다. 초등학교 1학년을 뽑는 1차 인터뷰. 120명을 뽑는데 4700여 명이 지원했다. 그나마 이것도 요즘 홍콩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전체적으로 줄어든 지원자 수라고 한다는데(이전엔 평균적으로 6000명 정도가 지원했다고 한다), 이런 경쟁률이면 엄마들이 좋은 과외 선생님 전화번호는 쉬쉬하는 것이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이렇게 심한 경쟁률로 이뤄지는 초등 입시를 학부모 정보 그룹챗에서 일주일 내내 접했다. 정말 입시가 시작이구나. 홍콩의 극성스러운 타이거맘들의 전쟁터. 어쩌다 보니 나도 그 한가운데에 있다는 것이 이제는 실감 난다.
하지만 나는 겁먹지 않기로 했다. 홍콩의 출산율이 낮아 폐교 뉴스가 며칠에 한 번씩 올라오는 이 마당에, 설마 우리 애 들어갈 학교 자리 하나 없을까. 다만 그 학교가 이왕이면 좋은 학교였으면 좋겠다는 것이 나의 바람인데, 그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희망사항일 뿐이다. 욕심을 내자면 끝이 없는 것이니, 나는 제일 좋은 학교를 원하는 대신, 우리 아이의 성향과 잘 맞고, 또 숙제를 많이 주지 않는 그런 학교를 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마음먹고 이 전쟁터에서 한 발짝 정도 물러서보니, 나 혼자 이 경쟁 안에서 마이웨이 하는 것에 심적 부담감은 많이 줄어들었다. 이제 1년. 이 전쟁터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게 될지 기대 반 걱정 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