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17, 2026

안아주고 싶고, 본받고 싶은, 아름다운 사람

by 헤매이는 자

파리의 유서 깊고 아름다운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하는 로미오와 줄리엣 발레 티켓을 구했다.

이미 전부 매진된 표이지만, 신용카드 최고 등급 VIP 라고 붙여준 담당 컨시어지가 대신 구해줬다.

아마 오페라 하우스의 멤버들에게 할당된 표를 '뒷문으로' 구해주는 시스템인 것 같다.

소비자 가격보다는 네다섯배 정도 비싸게 산 셈이지만, 1등석이라 기대가 된다.


나만의 개인비서처럼,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표를 구해주는 사람에게 매일 상황 보고를 받다보니,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 아닌 내가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돈이 행복을 가져다 주는 건 아니지만, 편의를 가져다 주는 건 확실한 것 같다.


토요일이지만 일하고 있다.

점심을 먹으며 창밖을 보니, 그녀가 떠오른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가 기억난다.

일자리도 없고, 따뜻한 사무실도 없고, 몇만원도 없어서 롯데월드도 갈 수 없던 시절.


그때 난 친구들과 새벽 5시부터 인력 사무소에 가서 줄을 섰다.

일이 없어서 헛탕 치는 경우도 있었지만, 있는 경우는 무작위로 뽑혀 모르는 업무 장소로 이동했다.


하루는 건물을 부수는 일을 했다.

녹이 슨 못에 손등이 찍혀, 파상풍을 걱정하기 전 예수님이 이렇게 아프셨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날그날의 일당을 다 써서 소주 몇 병과 안주 거리들을 사가던 반장 아저씨의 모습이 생생하다.

"하루살이처럼 사는 거지 뭐" 라는 말이 기억에 남았다.


하루는 나이트 클럽을 만드는 일을 했다.

'그랜드 오픈' 날이라며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나는 소파를 나르고 벽지를 발랐다.

미리 섭외가 된 건지 헐벗은 여자 분들이 오픈 전부터 들어와서 방마다 앉아 있었다.

다리에 쫙 달라붙는 스키니한 정장을 입고 머리를 검게 세운 잘 생긴 남자들이 줄을 서서 들어왔다.

분명 나와 동갑이거나 나보다도 어린 것 같았는데, 나는 목장갑을 끼고 있으려니 뭔가 부끄러웠다.


하루는 시체를 닦는 일을 했다.

어느 큰 병원의 영안실을 갔다. 내 살아생전 처음으로 죽은 사람들을 봤다.

나와 똑같은 사람인데, 핏기 없이 누워있는 사람은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 나와 죽은 사람의 사이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벽이 있었다.


난 돈이 없었다.

집안이 가난했다. 뭐, 사실 지금도 가난하긴 하다.

양변기가 없는 집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아빠는 평생 돈을 못 버는 사람이었고, 엄마는 평생 돈에 쫓겨 바가지를 긁는 사람이었다.


한 주의 식비로 만원도 남지 않았을 때가 있다.

침대가 내 키보다 짧아서, 정강이가 자꾸 부딪혀서 몇 번 찢어졌다.

친구들이 여행을 가자고 할 때, 내 경비를 감당할 수 없어서, 안 가겠다고 한 적이 많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사장님이 던져주신 유통기한이 지난 과자로 배를 채웠다.

'감자칩은 유통기한이 지나면 더 맛있다구' 라며 웃던 그 웃음이 아직도 기억난다.


생활비가 없어서, 가난한 걸 뻔히 아는 부모님께 손을 벌려야 했던 기억.

부모님께 보낼 용돈이 모자라서, 사채까지 알아봤던 기억.

쓰리잡, 아니 포잡까지 뛰었던 기억.


나는 10원 한 장도 아끼는 사람이 됐다.

돈을 벌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고 하는 사람이 됐다.

노는 것보다 일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고 쉬운 사람이 됐다.

가장이 됐다.


그랬던 내가,

파리의 오페라 하우스의 제일 좋은 자리에서,

어딜 가나 수많은 여성들 중에 얼굴도 제일 예쁘고, 몸매도 제일 섹시해서,

뭇 남성들이 위아래로 훑어보고, 뭇 여성들이 선망과 질투의 눈빛으로 째려보고,

어느 상점의 어느 점원이든, 내가 돈이 많아서 이런 여자를 사귀는 줄 아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를 곁에 두고 보는 날이 오다니.


먹고 싶은 건 뭐든 먹을 수 있고,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갈 수 있고,

갖고 싶은 건 뭐든 살 수 있고,

환상적인 여자에게 사랑받고 있다니.


그리고 내가 생활이 여유로워서, 혹은 연봉이 얼마여서, 혹은 선물을 많이 사줘서가 아니라,

어떻게든 먹고 살기 위해 고군분투할 줄 알고, 힘든 시기를 지혜와 성실함으로 잘 버텨냈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나를 사랑해주는 여자와 평생을 함께 하기로 했다니.


자기가 나보다 더 돈을 많이 벌어서, 내가 일을 그만 둬도 먹여살려준다고 하고,

내 연봉을 듣고는 어떻게 써먹을까 고민하는 게 아니라, 자신도 벌고 싶다며 오히려 질투하고,

언젠가 나에게 4억대 시계를 사주겠다고 진지하게 말하며, 매일 성장을 꿈꾸는 여자를 만나다니.


내 삶은 이미 성공했다.


Started from the bottom, now we're here

Started from the bottom, now my whole team f*ckin' here

Started from the bottom, now we're here

Started from the bottom, now the whole team here, n*gga


- Dra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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