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의 세계에선 모른다고 말하면 안 되나요?
내 손에 들린 보드마카가 천근만근 무거웠다
“괘안타, 괘안타. 신입은 다 그런기라. 근데 인자 곧 주간 회의 시작인데, 준비는 됐나?”
선배의 말에, 나는 영문도 모른 채 회의실로 끌려갔다. 문이 열리는 순간, 나는 퀴퀴한 종이 냄새와 긴장감이 뒤섞인 공기에 숨이 턱 막혔다. 그곳엔 빼곡하게 알 수 없는 도표와 글씨가 적힌 거대한 화이트보드가 버티고 서 있었다. 선배들은 저마다 두꺼운 프린트물을 넘기며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투명인간이 되기 위해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나의 바람과는 달리,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팀장님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어이, 신입. 어제 첫 출근했다꼬 빼줄 순 없지. 정신 똑디 차리고 잘 들어라.”
그 말은 서막에 불과했다. 팀장님은 화이트보드를 가리키며 열정적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프린트물과 화이트보드를 번갈아 보았지만, 내 눈에는 모든 것이 암호 해독표처럼 보일 뿐이었다. 한참을 설명하던 팀장님이 갑자기 보드마카를 들고 나를 쳐다봤다.
“자, 신입. 일로 한번 나와봐라.”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모든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나는 로봇처럼 삐걱거리며 일어나 화이트보드 앞으로 걸어 나갔다. 팀장님이 내 손에 보드마카를 쥐여주며 말했다.
“여기 이 칸에, 우리 주력 상품인 ABC-100 모델, 지난주 A업체 납품 수량 한번 적어봐라. 아까 박 대리가 알려줬제?”
머릿속이 하얘졌다. 방금 전, 복도에서 박 대리님이 분명 “신입, A업체에 380개 나간 거 기억해 놔.”라고 말해주셨다. 너무 긴장한 탓에, 그 숫자가 머릿속에서 희미하게 흩어지고 있었다. ‘380… 380이었나? 아니면 350이었나?’
화이트보드 앞의 나는, 마치 사형선고를 기다리는 죄수 같았다. 1초가 1년처럼 느껴졌다. 결국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희미한 기억에 의존해 ‘350’이라는 숫자를 적었다.
그 순간, 회의실의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팀장님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생각해봐라.”
나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 선배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그는 내 손에서 보드마카를 조용히 가져가더니, 내가 쓴 ‘350’ 위에 두 줄을 긋고, 그 옆에 ‘380’이라고 고쳐 적었다.
회의가 끝나고, 나는 도망치듯 자리로 돌아왔다. 모두가 나를 비웃는 것만 같아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짐을 챙겨 나가려는데, 팀장님이 내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갔다.
“신입, 정신 단디 챙겨래이. 숫자는 우리 일의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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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마디가, 그날 밤 꿈속까지 나를 쫓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