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 가을볕이 사선으로 길게 눕던 오후
로비의 소란함이 유독 아득하게 들리던 시간
계단 너머로 흰 옷자락이 먼저 비쳤다.
마른 잎이 구르는 냄새 대신
어딘가 낯설고 투명한 향기가 배어들고
느릿하게 올라오는 그녀의 발걸음마다
필름의 속도가 뚝, 멈춰 섰다.
하얀 롱코트와 정갈하게 내려온 긴 머리
난간을 잡은 손 끝에 머물던 조그만 떨림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 채
계단을 오르는 한 마리 길 잃은 토끼 같았다.
계절은 분명 가을의 한복판이었으나
내 시야에는 시린 첫눈이 흩날렸다.
소리 없이, 아주 눈부시게.
극장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겨우 일주일째 되던 날이었다. 팝콘 기계가 돌아가는 소음과 관객들의 웅성거림에 겨우 익숙해질 무렵, 가을은 극장의 높은 유리창을 뚫고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오후 4시의 햇살은 유독 정직했다. 먼지 하나하나의 궤적을 투명하게 드러내며 로비 바닥에 긴 사각형의 빛의 지도를 그려놓곤 했다. 나는 상영관 입구 옆 난간에 기대어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지직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때였다.
로비 1층에서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너머로, 하얀색의 무언가가 보였다. 그것은 아주 느릿한 리듬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펄럭이는 옷자락이, 그다음에는 난간을 잡은 가녀린 손가락이,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전부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계절을 앞질러 온 사람 같았다. 가을의 채도가 높은 붉은빛들 사이에서, 그녀가 입은 하얀 롱코트는 유독 이질적이어서 눈이 시렸다. 정갈하게 빗어 넘긴 긴 생머리는 그녀가 한 계단씩 오를 때마다 부드러운 파동을 그리며 어깨 위에서 찰랑거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로비는 평소처럼 소란스러웠을 텐데, 내 귀에는 오직 그녀의 구두가 대리석 계단에 부딪히는 '톡, 톡' 소리만이 선명하게 박혔다.
영화 속에서 중요한 장면이 시작될 때 갑자기 배경음악이 잦아들고 슬로 모션이 걸리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속도가 그녀의 발걸음에 맞춰 재편되고 있었다.
그녀가 계단 끝에 다다랐을 때, 나는 숨을 멈췄다. 가까이서 본 그녀는 마치 길을 잃고 낯선 숲에 들어온 어린 토끼 같았다. 커다란 눈망울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고 있었고, 살짝 발그레해진 뺨은 차가운 가을바람을 뚫고 온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녀가 누구인지, 왜 이곳에 왔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직감했다. 방금 내 인생의 스크린 위에 아주 중요한 인물이 등장했다는 것을.
알고 보니 그녀는 오늘부터 우리 팀, 즉 검표(Floor) 파트에서 함께 일하게 된 신입이었다. 나를 이곳으로 불러주었던 초등학교 동창이자 팀장인 그녀가 내 곁으로 다가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온 신입이야. 네가 잘 좀 가르쳐줘. 네가 제~일 꼼꼼하니까 사수로 붙여주는 거야."
친구의 배려 섞인 한마디에 내 심장은 다시 한번 요동쳤다. 사수와 부사수. 그 묘한 거리감 속에서 나는 그녀의 첫걸음을 안내하는 길잡이가 되었다.
그녀는 내 곁을 지나쳐 내가 서 있던 곳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는 버터 냄새 가득한 극장 공기와는 전혀 다른, 투명하고 서늘한 향기가 남았다. 그 향기는 나중에 그녀가 매표(Box Office) 파트로 자리를 옮기게 되어 우리가 서로 다른 유니폼을 입게 된 후에도, 내 기억 속에 박제되어 잊히지 않는 향기가 되었다.
분명 밖에는 낙엽이 뒹굴고 있을 10월의 어느 날이었지만, 내 마음속엔 예고도 없이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시야가 온통 하얗게 번졌다.
아주 눈부시고, 먹먹하게.
나는 한참 동안 내 곁에 선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난간을 잡고 있던 내 손바닥에 배어든 땀을 남몰래 닦아냈다. 그것이 그녀와 나의 첫 장면이었다.
시나리오에는 없었으나, 결코 지울 수 없는 가장 선명한 오프닝 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