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3화. 검표하는 남자, 매표하는 여자

by 완작가


2-3. 닿지 않는 시선, 사각지대의 매표소.png


EP 3. 검표하는 남자, 매표하는 여자


한 울타리 안에서

다른 무늬의 옷을 입고

층계 하나를 사이에 둔 채

기나긴 하루를 견뎠다.


1층 길거리로 열린 매표소의 활기

2층 상영관 문앞 무전기의 지직거림

그 사이를 메우는 것은

닿지 않는 계절의 정적뿐.


투명한 유리창은 벽이 되고

높다란 계단은 차마 넘지 못할 경계가 되어

우리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이지 않는 평행선을 그었다.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은

늘 발걸음보다 한참이나 느려서

계단 아래 보이지 않는 당신을 찾는 일은

내게 가장 긴 상영 시간이었다.


우리는 티켓 한 장의 거리만큼

멀고도 가까운 평행선 위에서

끝내 마주치지 못할 영화를 보았다.




친구의 배려, 혹은 장난 섞인 권력 남용으로 나는 그녀의 사수가 되었다.


'계단을 오르는 토끼' 같았던 그녀가 내 부사수가 되어 내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니기 시작했을 때, 나는 평생 쓸 집중력을 그 일주일간 다 써버린 것 같았다.


그녀의 작은 발소리가 내 등 뒤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들려올 때마다, 나는 마치 등에 눈이 달린 사람처럼 온 신경이 뒤쪽으로 쏠렸다. 혹여나 복도의 턱에 걸리지는 않을지, 낯선 환경에 겁을 먹지는 않을지 걱정하면서도 정작 고개는 뻣뻣하게 앞만 향했다.


"단순히 표를 찢는 게 아니에요. 관객들이 상영관에 들어설 때의 그 첫 표정을 우리가 결정하는 거죠. 우리가 친절하면 그분들이 영화를 보는 시간이 더 즐거울 거예요."


최대한 담담하고 프로페셔널해 보이려 애쓰며 내뱉은 말이었지만, 정작 내 손끝은 무전기를 쥘 때마다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가르쳐야 할 수칙들은 머릿속에서 엉키기 일쑤였고, 그녀의 맑은 대답 한 마디에 나는 애먼 노란색 유니폼만 만지작거렸다.


나에게는 조금 큰, 헐렁한 유니폼 셔츠가 그날따라 유독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그녀는 내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작은 수첩에 정갈한 글씨로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그 수첩 위로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흘러내릴 때마다, 영사기 불빛에 반사되어 윤기가 흐르는 그 머릿결에 시선을 빼앗겨 가르치던 문장의 끝을 맺지 못한 적도 많았다.


어둡고 폐쇄적인 상영관 복도가 그녀와 함께 있다는 이유만으로 비밀스럽고 아늑한 아지트처럼 느껴지던 나날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밀월 같은 교육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녀 특유의 맑은 목소리와 단정한 인상을 눈여겨본 총괄 매니저가 그녀를 매표(Box Office) 파트로 차출했기 때문이다.


"거기는 사람이 너무 많고 힘들 텐데..."


라는 걱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나는 그저 잘됐다는 짧은 격려밖에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나와 함께 입었던 노란색 셔츠를 벗고, 매표팀의 화사한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옷의 색깔이 바뀌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내 세계에서 아주 먼 곳으로 떠나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철저히 분리된 세계에서 살게 되었다.


그녀가 머무는 1층 매표소는 번화가 길거리와 바로 맞닿아 있었다. 통유리 너머로 바삐 지나가는 행인들과 차가운 겨울바람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녀가 있는 부스 안만큼은 늘 밝고 따뜻한 조명이 쏟아졌다. 그녀는 그곳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설렘의 입장권을 건넸다.


밝은 조명 아래서 티켓을 건네는 그녀의 미소는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완벽하게 정제되어 있었다. 반면 나는 2층, 상영관이 모여 있는 조금 더 정적이고 어두운 구역을 지켰다.


그녀가 티켓을 끊어주면 관객들은 계단으로 걸어 2층으로 올라와 나에게로 왔다. 내가 서 있는 상영관 입구에서 난간 너머 아래를 아무리 내려다보아도, 그녀의 모습은 좀체 보이지 않았다.


1층 매표소 창구가 2층으로 올라오는 거대한 계단의 굴곡 안쪽 깊숙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각지대는 나를 더욱 애타게 만들었다. 보이지 않기에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상상으로 채워 넣어야 했고, 그 상상은 실제보다 더 눈부신 색채로 내 머릿속을 수놓곤 했다.


그 층간의 높이 차이와 시야를 가로막은 계단은 우리가 공유하는 물리적인 거리인 동시에, 내가 결코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심리적 경계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끊어준 티켓 한 장이 관객의 손을 거쳐 2층의 나에게 전달될 때, 그 종이에 남은 미미한 온기만이 그녀의 손길이 닿았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단서였다.


나는 매번 관객에게서 건네받은 티켓의 가장자리를 만지며, 보이지 않는 아래층의 분주함을 가늠하곤 했다. 로비가 한산해지는 평일 오후가 되면, 나는 2층 난간에 기대어 먼발치 아래의 계단 안쪽 그늘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곤 했다.


길거리를 지나던 사람들이 그녀의 창구 앞에 멈춰 서서 대화를 나누고 티켓을 사는 소리가 꼭 다른 나라의 풍경처럼 아득하게 들려왔다.


유리창에 가로막히고 층으로 나뉘고, 심지어 계단 뒤로 몸을 숨긴 그녀의 존재는 가깝지만 결코 닿을 수 없는 피사체 같았다. 시선조차 허락되지 않는 거리감은 그리움을 더 날카롭게 벼려놓았다. 그럴 때면 무전기 너머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건조한 기계음 사이로 섞여 들어오는 그녀의 숨소리라도 듣고 싶어 무전기를 귀에 바짝 가져다 대기도 했다.


"매표입니다. 3관 티켓 마감했습니다."


그 짧고 건조한 목소리가 내 귓가에 닿을 때마다, 나는 마치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른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 지직거리는 무전기의 소음조차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감미로운 음악이 되었다. 눈으로는 볼 수 없었지만, 목소리만으로 그녀의 위치를 확인하는 그 찰나가 내겐 하루 중 가장 소중한 컷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일을 마친 후 유니폼을 갈아입고 퇴근하는 길에도, 1층 로비 한복판에서 동료들과 웃으며 수다를 떠는 그녀의 원 안으로 내려갈 용기는 내게 없었다. 나는 그저 2층에서 그녀의 웃음소리가 공기 중에 흩어지는 것을 지켜보며, 내 몫의 고독을 챙겨 극장 문을 나섰다.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은 늘, 내 무거운 발걸음보다 한참이나 느렸다. 우리는 같은 영화관이라는 거대한 필름 안에서 돌아가고 있었지만, 서로 다른 장면을 찍고 있는 배우들 같았다.


그녀는 1층의 환한 빛 아래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이었고, 나는 2층의 그늘 아래서, 보이지 않는 주인공이 보낸 관객을 맞이하는 이름 없는 조연이었다.


티켓 한 장의 거리, 그리고 1층과 2층이라는 층간의 간극.


무엇보다 계단이라는 거대한 가림막이 주는 안타까움.


그 짧고도 깊은 거리만큼이나 멀고도 가까웠던 우리의 평행선은, 그렇게 깊어가는 가을을 지나 시린 겨울의 문턱으로 소리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우리가 서로의 존재를 온전히 인식하게 될 더 큰 사건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때의 나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로.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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