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4화. 정적을 깬 전화 한 통

by 완작가
2-4. 정적 속의 벨소리.png


EP 4. 정적을 깬 전화 한 통


당신이 없는 창구는

불 꺼진 상영관처럼 서늘해서

비어 있는 의자 위로

먼지만이 고요히 가라앉았다.


항상 빛의 중심이었던 유리 부스

이제는 차가운 비구름을 투영하고

무전기 너머 들려오던 익숙한 마감 소식 대신

낯선 목소리가 정적을 깰 때

나의 계절은 돌연 멈춰 섰다.


어두운 방,

홀로 앓던 열병 끝에

정적을 가르고 울린 낮은 진동

푸른 화면 위로 번진 당신의 이름은

긴 밤을 헤매던 나의 유일한 이정표.


수화기 너머 먼저 닿은 숨소리에

심장은 갈 길을 잃고 멎어버렸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밤의 부름은

우리의 평행선을 부수고

가장 내밀한 꿈의 입구로

나를 조용히 끌어당겼다.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출근하자마자 습관처럼 2층 난간으로 달려가 내려다본 1층 매표소 창구는 불이 꺼진 채 차갑게 식어 있었다.


항상 길거리를 향해 환하게 빛을 뿜어내며 관객을 불러모으던 그곳은 마치 이 극장의 등대와도 같았으나, 이제는 주인을 잃은 상영관처럼 텅 빈 채 먼지만이 고요히 내려앉아 있었다.


항상 그녀의 손길로 정돈되어 있던 작은 마이크와 차곡차곡 쌓여 있던 티켓 용지들이 주인을 잃은 유품처럼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무전기에서도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매표입니다. 3관 티켓 마감했습니다"


라고 말하던 단호하면서도 끝이 맑게 울리던 그 음성 대신, 낯선 선배의 거친 기계음이 정적을 깨울 때마다 나의 심장은 딛고 있던 바닥이 사라지는 듯한 아득한 추락을 경험했다.


"매표에 토끼(그녀의 별명)는 왜 안 나왔어?"


검표 팀장이자 친구인 그녀에게 최대한 무심한 척, 일상적인 질문인 양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은 나의 세상을 일순간에 정지시켰다.


교통사고. 퇴근길에 차 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은 청천벽력보다 더 무겁게 내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 순간, 극장의 모든 소음이 소거되었다. 팝콘 기계가 옥수수를 튀겨내는 경쾌한 소리도,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알리는 웅장한 배경음악도, 관객들의 가벼운 웃음소리도 아득한 먼 곳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나는 2층 난간을 쥔 손에 하얗게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힘을 준 채 한참을 서 있었다. 계단 안쪽, 보이지 않는 매표소의 사각지대를 응시하며 내 몫의 평행선이 얼마나 위태롭게 그녀라는 존재에 의존하고 있었는지를, 그 부재를 통해 처절하게 깨달았다.


며칠 동안 나는 지독한 열병을 앓는 사람처럼 지냈다. 업무에 집중할 수 없었고,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소리에 예민하게 귀를 기울였지만 내가 찾는 목소리는 끝내 들려오지 않았다.


시선이 닿지 않아도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 하루를 지탱해주던 평행선이 끊어지자, 나는 항로를 잃은 조난자처럼 극장 안을 부유했다.


퇴근 후 어두운 방에 누워 있으면, 귓가에는 환청처럼 그녀가 마감 수치를 부르는 소리가 맴돌았고, 눈을 감으면 계단을 오르던 하얀 롱코트의 눈부신 잔상이 망막을 어지럽혔다. 그리움은 몸 안의 수분을 다 앗아가는 열꽃처럼 피어나 내 온몸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러던 그날 늦은 저녁이었다.


방안의 유일한 온기였던 작은 스탠드마저 꺼버린 채 무거운 침묵 속에 잠겨 있을 때, 머리맡에 두었던 휴대폰이 돌연 날카로운 진동을 내뿜으며 고요를 찢었다.


징-, 징-


하고 파르르 떨리는 진동 소리가 방안의 차가운 공기를 사정없이 헤집어 놓았다.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린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유독 눈부시게 푸른 빛을 발산하는 화면 위의 이름이었다.


그녀였다.


심장이 덜컥, 하고 멈춰 섰다.


2층 난간 위의 관찰자로만 머물며 조용히 그녀의 궤적을 쫓던 내게, 그녀의 이름이 직접적으로 닿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당황스러움과 형언할 수 없는 걱정,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알 수 없는 설렘이 뒤섞여 수화기를 잡으려는 손끝이 겨울 서리 맞은 잎사귀처럼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왜 이 늦은 시간에, 그것도 낯선 병실의 침묵 속에서 나에게 전화를 걸었을까.


사수와 부사수라는 이름 뒤에 숨겨두었던 나의 비겁한 진심이 그녀에게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이 요동쳤다. 나는 끊어질 듯한 벨소리를 간절하게 붙잡듯 조심스럽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것은 조금은 잠긴 듯한, 하지만 분명히 내 기억 속 가장 깊은 곳에 박제되어 있던 그 목소리였다. 포근한 모래알처럼 서걱거리면서도 투명한 그 한 마디가 귓가에 닿는 순간, 며칠간 나를 지독하게 괴롭히던 열병이 비로소 마법처럼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저... 2층 검표하는 사수예요. 몸은 좀 어때요? 사고 소식 듣고 정말... 정말 많이 걱정했어요."


내 목소리는 예상보다 훨씬 더 투박하게 갈라져 있었고, 숨길 수 없는 떨림이 문장 사이사이에 묻어났다.


그녀가 왜 나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는지, 그 비밀스러운 이유를 그때의 나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저 병실의 정적이 너무 깊어서였을까,


아니면 나처럼 그녀도 계단 너머 보이지 않던 누군가를 떠올렸던 것일까.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수화기를 타고 흐르는 그녀의 옅은 숨소리와 그 너머의 병원 소음을 듣는 것만으로도 나는 모든 의문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전화 받아 주셔서 감사해요. 정말 보고 싶었어요... 극장도, 사람들도요."


그녀의 대답 뒤에 찾아온 찰나의 정적은 예전의 차가운 평행선과는 결이 달랐다. 그것은 서로의 세계로 조심스럽게 첫 발을 내딛는 떨림의 정적이었고, 침묵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서사였다.


비로소 우리의 평행선이 굴절되어 마침내 맞닿았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주말에 병문안을 가겠다고 약속했고, 그녀는 수줍게 대답했다.


전화를 끊고 난 후에도 손바닥에 남은 휴대폰의 온기가 꼭 그녀의 손을 잡은 것처럼 따뜻해서, 나는 한참 동안 그 온기를 놓지 못했다.


그날 밤, 정적을 깬 그녀의 전화 한 통은 내 인생이라는 영화의 장르를 짝사랑의 비극에서 소망의 드라마로 바꿔놓았다.


그녀가 왜 나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는지, 그 소중한 이유는 가슴 한구석에 비밀처럼 묻어둔 채 나는 비로소 며칠 만에 깊고 평온한 잠에 들 수 있었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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